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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당(黨)문화] 제7장 생활 속의 당문화(2·3)

편집부  |  202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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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SOH 자료실]


목차


2. 전통 명절을 없애버리고 당 명절을 배치


3. 결혼할 때 천지신명에게 알리는 대신 당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야


1) 정통 문화 속의 혼례


2) 혼례에 대한 중공의 왜곡


***********


2. 전통 명절을 없애버리고 당 명절을 배치




▲ 당문화로 빚은 만두 : 중공은 전통의 요소를 단절하기 위해 가정, 의식주, 관혼상제, 역법, 명절 등 과거의 모든 것을 타파하고 당문화로 대체했다. [사진=에포크타임스]


[SOH] 중공은 전통 명절인 설을 ‘춘절(春節)’로 부른 것 외에도 또 아주 많은 명절을 없애버렸고 그를 대신해 당 명절을 배치했다. 이를 통해 당 문화로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전통문화의 영향을 대체한 것이다.


중국의 전통 명절은 모두 수련, 신불(神佛)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비교적 중요한 전통적 명절로는 설을 제외한 외에도 또 원소절(元宵節), 청명절(清明節), 단오절(端午節), 우란분회(盂蘭盆會), 중추절(中秋節), 중양절(重陽節), 동지(冬至), 그 외에도 욕불절(浴佛節), 칠석(七夕) 등이 있다.


원소절은 보통 ‘정월 대보름’이라고 한다. 원래 도교의 ‘상원절(上元節)’에서 온 것인데 전설에 의하면 천궁대제(天官大帝)의 탄신일이라고 한다. 한나라 명제(明帝)가 불법(佛法)을 믿고 존중하여 사찰과 민간에 명을 내려 이날 하루 등불을 켜게 함으로써 불법이 크게 밝은 것을 상징하게 했다. 이때부터 원소절은 또한 등불을 밝히는 날이 되었다.


청명절은 조상의 제를 지내고 성묘하는 때를 말한다. 단오절의 기원에 관해서는 하나는 굴원을 제사 지낸 데서 기원했다는 설과 용신(龍神) 숭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중추절은 주(周)나라에서 기원한 것으로 주나라 천왕(天王)이 매년 한가위에 달에 제사를 지냈으며 나중에 점차적으로 달을 감상하는 풍속으로 남았다. 중양절은 9월 9일을 말하는데 중국의 술수(術數)에서 ‘구(九)’는 가장 높고(도가에서는 9층천을 말한다), 극히 넓으며(九州方圓), 극히 깊고(九地之下), 장구함 등을 상징한다. 이때 사람들은 국화를 감상하고 산수유를 몸에 달고 국화주를 마셨다. 동지는 제왕(帝王)이 천단(天坛)에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욕불절(浴佛節)은 음력 사월 초팔일인데 또 석가탄신일(佛誕節) 또는 용화회(龍華會)라고도 한다. 이날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하신 날이다. 이 날 부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찰에 들어가 향을 피우고 재회(齋會)에 참가하며, 시주를 거행하고 방생 등의 활동을 한다. 칠석은 7월 7일을 말하는데 견우와 직녀의 전설에서 기원한 것이다. 우란분회는 음력 7월 15일을 말하는데 망자를 달래는 명절이다. 이 날은 목건련(目犍連) 존자가 그 모친을 아귀지옥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재를 베풀어 스님들께 공양했다는 일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의 명절을 간단히 요약하면 제사, 신화 혹은 부처, 도교와 관계가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만약 이런 명절들이 보존될 수 있고 아울러 전통을 좇아 경축할 수 있다면 중국 문화 중에서 신과 관련 부분들이 대대로 전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공산당이 용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국인들과 중화 전통의 문화 도덕, 전통 문화 가치 사이의 전승과 연계를 끊어 버리기 위해 중공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더는 전통 문화의 영향과 보호를 받지 못하게 했고 완전히 당문화 속에 잠기게 했으며, 일상적인 풍습을 통해 민중들에 대한 세뇌를 진행했다. 중공은 정월 초하루를 ‘춘절’이라고 바꿔 남겨놓은 이외에, 기타 전통적인 명절들 중 중공이 공휴일로 지정한 것은 하나도 없다. 전통적인 명절 풍속은 중공의 압제로 생존 공간을 잃어버렸고 유감스럽게도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중공은 다른 ‘명절’을 제정하여 자신의 통치를 위해 봉사하도록 했다. 이런 ‘당 명절(黨節)’에는 ‘3․8 부녀절’, ‘5․1 노동절’, ‘5․4 청년절’, ‘6․1 아동절’, ‘7․1 당 생일’, ‘8․1 건군절(建軍節)’, ‘10․1 국경절(國慶節)’ 등이 있다.


명절을 쇨 때면 명절의 기원을 되돌아보는 것이 늘 그날의 인기 화제가 된다. 그러나 중공이 지정한 명절은 ‘계급투쟁’ 혹은 ‘혁명’과 관계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거나 혹은 중공 자체의 이정표적인 기념으로 명절을 정치화한 이런 작법은 바로 사람들을 중공의 이데올로기에 순종하게 하려는 목적이며, 중공의 성립과 발전을 경축하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당절(黨節)에는 휴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매번 ‘노래 경연 대회’, ‘문예공연’들을 조직해 공산 악당의 공덕과 은덕을 찬양하게 한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중공이 걸핏하면 그것의 명절 앞에 ‘국제’라는 두 글자를 씌우는데 마치 정말로 전 세계적으로 성대한 명절인 듯하다.


하지만 외국에 나온 후에야 사람들은 몇몇 작은 공산 국가들을 제외하고 외국 사람들이 쇠는 것은 모두 자기 민족 전통의 명절로 근본적으로 ‘3․8’, ‘5․1’, ‘6․1’ 따위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산당은 고의적으로 ‘노동자, 부녀와 아동’은 착취당하는 계급과 군체(群體)임을 과장하여 그들을 선동해 투쟁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공산국가의 ‘노동자, 부녀자와 아동’이야 말로 진정하게 압박을 받고 있다. 공산당이 이 몇 가지 명절을 이용하는 것은 그것의 계급투쟁의 필요에 협력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3․8 부녀절’에 흔히 볼 수 있는 활동은 모범 혹은 ‘3․8 붉은 기수’를 선출해, 여성을 주체로 한 운동회, 문예공연 등이거나 혹은 표창회, 경축회, 갈라 등 집회의 성격을 띤 활동을 거행한다. 최근에는 3․8절 경축에서도 새로운 것을 창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어떤 방식을 사용하던지 막론하고 주제는 이런 명절을 이용해 사람들 머릿속에 “여자는 세상의 절반”이며 “남녀는 모두 같다”는 당문화를 심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여성에 대한 당의 ‘관심’을 표현하며, 당이 부녀를 ‘해방’시켜 ‘평등’한 지위를 얻게 했다는 것을 두드러지게 하는 동시에 여성 모범들로 하여금 당의 공덕을 노래하고 충성을 표현하게 하여 다른 사람들을 세뇌한다.


‘5․1 노동절’은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를 중심으로 약 35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파업과 시위에서 기원한 것으로 시위자들은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5․1이 당절로 변하자 경축 활동은 주로 사람들에게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주입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또 하나의 특색은 ‘노동 모범’을 선거하는 것인데 아래에서 위에 이르기까지 사업이 출중하고 성과가 좋은 사람 혹은 각 항목 각 업종의 두드러진 대표에게 영예를 주거나 심지어 직접 입당시켜 스스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기쁜 가운데 자신의 일체는 당이 베풀어 준 것임을 잊지 않게 한다. 이런 우수한 자들과 통일 전선을 통해 각 업종을 진일보로 통제하는 동시에 자신의 외면을 강화한다.


‘5․4 청년절’은 1919. 5. 4 운동에서 기원한 것이다. 원래는 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애국 운동이었으나 공산당의 선전을 통해 ‘각성한 중국 무산계급이 최초로 독립적인 정치역량으로 정치 무대에 등장’한 표지로 되었다.


‘6․1 아동절’을 경축하는 나라는 모두 ‘사회주의’ 혹은 ‘이전 사회주의’ 국가들이다. ‘아동절’의 기원에 대해서는 일치된 결론이 없다. 중공은 이 명절도 ‘반제국주의’에 귀결시켰다. ‘아동절’의 경축 활동은 부녀 연합회에서 관할한다. 공원에 가거나 문예 공연을 하거나 간에 아이들이 명절을 쇠는데 도리어 아이들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이들이 말을 하려면 어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어린이 말’을 해야 한다. 각종 활동은 교사들이 모두 준비해 놓는데 그 의의는 단순히 경축과 오락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5강4미(五講四美)’, ‘계승자가 되자’, ‘영욕을 알고 6․1을 경축하자(知榮辱慶六一)’ 등 활동의 주제는 모두 당의 어느 단계 정책과 요구에 부합해야 한다. 아이들이 늘 보고 듣는 것은 당문화 속에서 문예라는 명의를 빌려 정치적인 목적에 도달하는 수단이다. 또 ‘주제대의 날(主題隊日)’, ‘노래 대회’가 이 있는데 천진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이런 허위적인 방식에 적응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6․1 무렵은 소선대(少先隊)에 들어가는 날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소선대 깃발’ 아래에서 “중국 공산당의 영도를 받아들이고 공산주의 사업을 위해 평생 분투할 것”을 선서한다. 사실상 어려서부터 아이들을 중공의 사악한 정치 속으로 끌어넣는 것이다.


‘7․1’은 이도저도 아닌 ‘명절’이다. 왜냐하면 중공은 7월 1일 성립된 것이 아님에도 중공에 의해 ‘당의 생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사실, 중공은 소련이 1920년 8월에 보이틴스키를 중국에 파견하여 건립한 것으로 당명 역시 소련이 지어준 것이다. 당시에는 ‘제3 인터내셔널 중국 지부ㅡ또는 중국 공산당이라 칭함’이라고 했다. 그것의 사명은 소련을 대신해 ‘중화민국을 뒤엎고 중국 국민당을 소멸하는’ 무산계급 혁명이었다. 1921년 7월에 소집한 것은 다만 중공의 대표대회일 뿐이다. 상식적으로 추론해도 먼저 공산당이 있었고 대표대회는 나중에 있어야 한다.


중공 제1차 당 대표대회는 소련 사람이 돈을 대어 열렸다. 나중에 왕정위(汪精衛)에게 빌붙어 매국노가 된 천궁보(陳公博)가 중공 창시인이자 제1대 대표였다. 그는 갓 결혼한 부인을 데리고 회의를 이용해 상해로 ‘공짜여행’을 왔고 대동(大東)여관에 투숙했다. 7월 31일, 천궁보가 투숙한 옆방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프랑스 조계지 경찰들이 와서 안건을 조사하게 되자 중공은 자싱(嘉興) 남호(南湖)로 옮겨 회의를 열었다. 그때에는 정당을 설립하는 것이 합법적이라 경찰이 중공 대표를 체포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지만 중공은 도리어 경찰이 온 것은 ‘대적 투쟁’의 험악함이라고 과장했다. 1981년, 중공 당사 연구실은 1921년 8월초 《신보(申報)》에 실린 살인 사건 보도로부터 중공이 설립된 시간을 7월 23일로 추산해 내고 아울러 《중공 당사 대사년표(中共黨史大事年表)》에 써 넣었다.


‘7․1’은 ‘명절’이긴 하지만 ‘휴일’은 아니다. 하지만 도리어 각급 당위원회와 중공 선전부에서는 사회적으로 전력을 다해 선전하는 중요한 시기이다. 외부적으로 그럴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더욱 그러하다. 당원은 각종 조직 활동에 참가해야 하며, 당의 각급 지도자들은 연설을 해야 하는데 역시 해마다 한 번씩 당원들에게 다시 충전시켜 당성을 강화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 외에 신입 당원을 입당시키는 것도 대개는 7․1 무렵을 선택한다. 중국에서 온 사회가 7․1을 명절로 승인하는 것은 바로 중국에 대한 중공의 점거를 승인하는 것이다. 이런 명절은 매년 한 번씩 중공에게 수혈(輸血)해 주고 중공의 생명력을 강화하는 작용을 한다.


‘8․1 건군절’은 중공이 ‘난창기의(南昌起義)’ 폭동을 경축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당시의 배경은 국민 혁명군이 장제스(蔣介石)의 통솔 하에 1926년 북벌 전쟁을 일으켜 북양(北洋) 정부를 토벌했다. 인민들의 옹호가 있었기에 북벌군의 진전은 순조로웠고 국가는 곧 통일되는 듯했다. 그러나 중공은 한편으로는 스탈린의 명령을 받고 끊임없이 북벌을 파괴했고 심지어 무장폭동의 방법으로 광동까지 공격해 국민당이 북양 군벌을 무너뜨리는 것을 저지했다. 장제스는 할 수 없이 1927년 4월 27일 국민당 중에서 공산당을 제거했고 중공은 그해 8월 1일 난창폭동을 발동하여 무장 할거(割據)를 했다. 난창 폭동은 중공이 자신의 군대를 장악한 발단이었기에 ‘건군절’로 부른 것이다.


‘10․1’은 중공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을 건립한 날이다. 그럼에도 중공은 전 인민들에게 공동으로 소위 ‘국경절’을 경축하라고 요구한다. ‘국경’ 활동에는 중대한 정치적 의의를 부여하고 있는바 경축 행사의 주체는, 북경에서 거행되는 국빈 연회, 열병식, 불꽃놀이, 행진이다. 한편으로는 무력을 자랑하여 국민들을 놀라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꽃놀이, 국빈 연회, 원예 등으로 태평한 것처럼 꾸민다. 천안문 광장에 손중산(孫中山)의 거대한 초상을 놓아 대만과 ‘통일전선’을 나타내고, 행진으로 ‘만민이 옹호’하는 가상을 만들어 낸다. 이때쯤이면 텔레비전에서는 언제나 ‘개국대전(開國大典)’ 등 영화를 상영해 중공이 ‘해방’시키기가 쉽지 않았음을 추억하게 하여, 인위적으로 중국은 중공이 건립한 나라라는 정의를 내리게 함으로써 “공산당이 없으면 新중국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여 당과 국가를 뒤섞는다. 사람들에게 마치 중국은 중공이 건립한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사실상, 지금 아주 많은 중국인들은 10․1을 ‘국상일(國殤日)’이라고 부른다. 중공은 당을 건립한 그 때부터 중국인들에게 끝없는 고난을 가져다주었으며 특히 전국 정권을 탈취한 후에는 약 8천만 중국인들을 비정상적으로 죽게 했다. 아울러 수백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영토를 팔아먹었으며, 중화문화의 정화를 훼멸시켰고, 도덕과 생태방면에 만회할 수 없는 파괴를 조성했다. 중공은 인민들을 강요하여 그것의 성립과 발전을 경축하게 하는데 이것은 인민들에게 나날이 심각해지는 자신의 고난을 경축하게 한 것과 같다.


중공은 ‘5․1’, ‘10․1’을 일주일간의 긴 휴가로 변화시켰는데 비록 날은 많지만 스스로 조절할 여지는 없다. 중국인들은 이 며칠간 여행, 결혼 혹은 기타 중요한 활동을 배치하는데 이런 활동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 놓아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의 결혼사진 혹은 여행 기념사진을 가리키며 “이것은 내가 어느 해 ‘국경절’에 찍은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로부터 은연중에 중공의 명절을 일반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중대한 사건을 연계시키게 했다.


3. 결혼할 때 천지신명에게 알리는 대신 당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야


1) 정통 문화 속의 혼례


정통 문화는 4대 예절을 중시하는데 바로 관혼상제이다.


‘관례(冠禮)’란 성인이 되는 예절을 가리키는데 유가의 예절에 따르면, 남자는 20살이 되면 관례를 통해 성년이 된 것을 나타내는데 진정으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상례(喪禮)’는 사람이 세상을 뜬 후의 장례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흔히 승려나 도사를 청해 망자의 혼을 달랜다. ‘제례(祭禮)’란 바로 조상과 신에게 제를 지내는 예절이다. 중공은 정권을 탈취한 후, 위 세 가지 예의를 모두 버렸는데 이는 그 속에 하늘과 신을 경앙하는 것을 포함하여 제사를 경건하게 지내는 요소와 관계가 있다.


그런데 ‘혼례(婚禮)’는 필경 인생의 4대 즐거운 일 중의 하나이다. “죽거나 살거나 함께 고생하자며, 당신과 굳게 언약했었지, 섬섬옥수 고운 손 힘주어 잡고, 오순도순 백년해로하자고(死生契闊 與子成說 執子之手 與子偕老)” 중국의 옛 사람이든 서양인이든 막론하고 혼인은 일생의 약속이므로 천지신명에게 예를 올리고 정중하게 혼례를 치렀다.


《예기(禮記)》에는 전문적으로 ‘혼의(昏義)’를 따로 언급한 장(‘昏’은 가차한 글자로 ‘婚’과 같다. 옛 사람들은 혼례를 황혼 무렵에 거행했기 때문에 이 글자로 가차한 것이다)이 있다. 이곳에서는 ‘납채(納采), 문명(問名), 납길(納吉), 납징(納徵), 청기(請期), 친영(親迎)’ 육례(六禮)이다. 그 중 ‘납채’는 혼사를 제기하는 것이고, ‘문명’은 신부 측 성명을 물어 길흉을 점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납길’은 점친 기쁜 소식을 신부 측에 알려 주는 것이고, ‘납징’은 신랑 측에서 여자 측에 예물을 보내는 것이다. ‘청기’는 신랑 측에서 점을 쳐 선택한 혼례날을 신부 측에 보내 허락을 받는 것이다. ‘친영’은 신랑 측에서 신부를 맞아 오는 것을 가리킨다.


유가에서는 혼례는 남녀가 합하여 위로는 사당을 지키고 조상에 제를 지내는 일을 책임지게 하고 아래로는 후대를 키우는 것으로 여겨 혼례는 정중하고, 신중하며, 혼인을 존중하는 것을 바른 예로 보았다. 신부를 맞는 날, 신랑신부는 먼저 천지에 예를 올리고 하늘과 땅에 혼인의 증인이 되어줄 것을 청하며 부모님께 절을 올려 키워주신 은혜에 감사드림과 아울러 혼인의 증인이 되도록 한다. 부부가 맞절을 하는 것은 손님을 대하듯 서로 존중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서양에서도 신자가 결혼하려면 교회에 가서 천주를 모시고 증인으로 삼는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선서문을 읽어야 한다. “나는 오늘부터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 할 것을 약속합니다.”


2) 혼례에 대한 중공의 왜곡


정통 문화 중의 혼례는 한편으로는 천지신명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인륜을 겉으로 드러나는 기쁨과 함께 예절의 정중함을 잃지 않고 표현하는 것으로 조상에 대한 존경, 부모님께 대한 효성, 그리고 부부간의 은혜와 의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혼례의 세부적인 절차는 흔히 사람 일생의 가장 행복한 추억거리이다. 때문에 공산당도 필연코 혼례를 그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수호하는 중요 방식으로 만들려 했다. 중공의 간섭으로 중국인들의 혼사는 강렬한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예를 들면,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당 조직’의 비준이 있어야 하며 서로 다른 ‘계급’ 사이의 혼담은 경고를 받거나 비준하지 않는다. 그런데 당 간부는 흔히 ‘조직’에서 배우자를 맞춰주는데 이런 가정들은 당에 대한 감격으로 충만 되기에 당의 ‘미시적인 전투 보루’로 변한다. 혼례의 의식은 ‘새로운 일을 새로 할 것’을 고취하기에 더는 천지신명에게 절하지 않고 대신 당에 대한 찬가로 바뀌었으며 당이 전통적인 신의 위치를 대신했다.


《백년풍속변천(百年風俗變遷)》은 중공이 정권을 세운 후의 혼례형식을 제기했다. 복장에서 남자의 마고자 창파오(長袍), 여자의 봉황 모양의 모자와 예장이 레닌의 복장으로 바뀐 외에도 결혼 증인이 천, 지, 부모로부터 ‘당지부 서기’로 변했다. 결혼 시간도 ‘5․1’, ‘10․1’과 같이 중공이 규정한 명절을 선택하여 ‘천지에 절하던’ 데에서 ‘마오 주석의 초상에 경례’하는 것으로 변했다.


문화대혁명 때에는 결혼 전에 더욱 마오쩌둥 어록을 읽어야 했다. “우리는 모두 사면팔방에서 하나의 공동 혁명 목표를 위해 함께 모였다. 혁명 대오 중의 일체 사람은 모두 서로 관심을 갖고 서로 애호하며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 이리하여 혼인이란 사사로운 일이 ‘혁명’의 높이로 솟아오르게 되었다. 이중 한 가지 구절을 주의해 살펴보면, 바로 ‘혁명 대오중의 일체 사람’만이 비로소 “서 로 관심을 갖고 서로 애호하며 서로 도와주어야” 하며 혁명성이 인성보다 높다는 것이다. 동시에 또 “하늘이 크고 땅이 크다 해도 당의 은정(恩情)만은 못하다”, “부모의 정이 깊다 해도 마오 주석의 은정만은 못하다”, “마오쩌둥 사상은 대물림의 보배이니, 누가 반대한다면 그는 곧 우리의 원수라네”를 불러야 했다. 결혼식장에서도 ‘계급투쟁’의 활줄을 팽팽히 틀어쥐고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심을 표시해야 했던 것이다.


‘하늘이 크고 땅이 커도(天大地大)’라는 이 노래는 1966년 싱타이(邢台) 지진이 발생한 후 전해지기 시작했다. 혼례 때 ‘찬미시’와 같은 이런 가곡을 불렀는데 이것은 공산당이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아울러 사람들로 하여금 달콤한 혼인을 추억할 때 자연적으로 중공을 찬미하는 이런 가사들을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


문화대혁명 이후 아주 긴 시간 동안, 직장이 있는 많은 사람들, 특히 체면이 있는 사람들의 혼사일지라도 여전히 당 조직, 당 지도부의 개입을 피하지 못했고, 신랑 신부는 당의 관심에 감사를 표시해야 했다. 지금은 비록 중공이 혼인 형식에 구체적으로 간섭하지는 않지만 몇십 년 격리를 거친 정통 혼인예절은 이미 버려졌다. 그런데 이와 함께 혼인에 대한 신성함과 책임감마저 함께 버려졌다. 오늘날 매우 많은 혼례는 난잡하기 이를 데 없으며 이미 그 속의 신성함과 전통적 예의의 규범이라곤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많은 가정의 모순, 부부 사이의 감정 파탄, 하룻밤 정사의 유행은 중공이 정통적인 혼인 관념과 혼례 형식을 파괴한 것과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계속) / 에포크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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