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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그 사람-(14)
 
  
2007-05-26 03:18:15  |  조회 5575
장쩌민 그 사람-(14)


1976년에는 중국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당시 장쩌민의 나이는 50세이었다.  그해 중국에서는 탕산(唐山) 대지진이 일어났다. 리히터 규모 8.0 이상의 초강력 지진으로 몇 십만 인구가 사망했다. 기이하게도 그 해 저우언라이, 주더(朱德), 마오쩌둥과 같은 중공의 거두들이 잇달아 숨을 거두었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예젠잉(葉劍英)은  장칭(江靑)과 화궈펑(華國鋒)을 보살피라는 마오쩌둥의 유언을 어기고 왕둥싱(汪東興), 화궈펑과 손잡고 한 차례 모반을 일으켰다. 예젠잉은 왕둥싱이 장악하고 있는 8341부대를 이용해 당시의 중공 부주석이었던 왕훙원(王洪文), 정치국상무위원 장춘차오(張春橋), 정치국위원 장칭과 야오원위안(姚文元)을 체포했다. 장칭은 마오쩌둥의 미망인이었지만 마오쩌둥의 시체가 식기도 전에 조카 마오위안신(毛遠新)과 함께 죄인이 되어 “중공 간부들은 모두 끝이 안좋다”는 말을 증명했다.

4인방이 무너지자 중국 국민들은 모두 통쾌해 했다. 당시 베이징에서는 다음과 같은 우스개 소리가 떠돌았다. 덩샤오핑 비판운동을 책임진 장칭이 어느날 길에서 덩샤오핑을 만났다. 덩샤오핑이 장칭에게 운동이 잘 되어가냐며 말을 건네었다. 장칭은 “이미 한 달 동안 기세등등하게 활동을 벌였는데 이제 한달만 더 하게되면 당신을 철저히 넘어뜨릴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덩샤오핑은 장칭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만약 내가 당신을 비판하는 운동을 벌인다면 일주일도 안 걸릴것이다”라고 말했다한다.

당시 화궈펑과 예젠잉도 ‘상하이방’으로 소문 났던 ‘4인방’의 역량을 무시하지 못했다. 당시 상하이 4인방 악당들은 당 조직과 전국 국민에게 알리는 통보문을 발표하고 상하이에서 봉기를 일으키려고 작정했지만 군 내부의 지지를 얻지 못해 무산되고 말았다. 게다가 상하이방 주요 인물인 마톈수이(馬天水), 쉬징셴(徐景賢), 왕슈전(王秀珍)이 속임수에 넘어가 베이징으로 갔으므로  대세가 기울자 상하이방은 투항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화궈펑, 예젠잉이 이끌었던 중앙 정부는 쑤쩐화(蘇振華), 니즈푸(倪志福), 펑충(彭沖)을 상하이시위원회 제1, 2, 3 서기 겸 주임으로 임명했다. 이 세 사람은 또 중공중앙 공작팀의 팀장과 제1, 2의 부팀장으로 임명되어 상하이에 들어갔다.

그들은 상하이를 더욱 잘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상하이 출신 관리를 선발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당시 제1기계공업부 외무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장쩌민은 상하이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기에 임시 공작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상하이로 떠났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사실 상하이에 대해 부질없는 걱정을 한 것이었다. 상하이방은 상하이에서 몇 년 동안 통제권을 쥐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그들의 극좌적인 노선은 인민의 마음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중앙공작팀은 상하이에 들어가자 바로 상하이에 주둔하고 있던 제3군 3만여 명 군인들을 동원해 수백 대 군용차를 몰고 상하이 외곽에서 “4인방을 타도하자”, “중앙정부의 영명한 결정을 굳건히 옹호한다”는 구호를 외치도록하였다. 그러나 하루만에 상하이방은 철저히 타도 되었고 상하이시민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억압상태에 있었던 상하이 시민들은 푸단대, 교통대, 사범대 학생들을 따라 거리에 나가 4인방이 타도된 것을 경축했다. 우스개 소리에서 덩샤오핑이 장칭에게 말한 것처럼, 일주일이 채 못 되어 4인방은 머리를 들지 못했다. 이 때문에 상하이 시민들은 중앙공작팀을 열렬하게 환영했으며 장쩌민은 이러한 환대에 기뻐서 어찌할줄을 몰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팀이 필요 없게 되자 장쩌민은 아쉽지만 베이징으로 돌아가야 했다. 베이징에 돌아온 장쩌민은  제1기계공업부 외무국 국장 생활을 계속했다. 이렇게 중앙공작팀에 들어가 겪은 일은 장쩌민으로하여금  권력이란 어떤 것인지 체험하게 했으며 사람을 이용하는 그의 처세는 아편을 피웠을 때처럼 인이 박히게 만들었다. 한편 장쩌민은 반드시  더욱 큰 권력을 손에 쥐리라 결심했다.
 
장쩌민은 왕다오한에게 장래를 위하여  물심양면으로지속적인 투자를 했다. 하지만 판돈을 잘못 걸었다. 1978년, 예상 밖으로 덩샤오핑이 복직해 제11기 3중 전회를 열고 개혁개방 정책을 내놓은 것이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을 비판하고 반우파 명예 회복운동’ 중에서 형세에 따라 덩샤오핑을 격렬하게 비판한 적이 있었기에 하마터면 ‘3종류의 사람’에 분류돼 장래를 망칠 뻔했다. 1980년에 이르러서야 역전의 기회가 생겼는데 이번에도 왕다오한의 도움을 받았다.

1979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신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중앙에서는 구무(谷牧)를 주임으로 임명하고 국가수출입위원회와 외국투자위원회를 성립했는데 왕다오한은 부주임들 중 한 명으로 되었다. 1980년 8월, 왕다오한은 상하이 시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장쩌민은 제1기계공업부에서 곤경에 처해 있었다. 왕다오한은 이 사실을 알고 구무에게 장쩌민을 추천하면서 그가 지식 있는 간부이며 열사의 고아라고 말해주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수출입위원회와 외국투자위원회의 부주임으로 승직되어 부부장급 관리가 되었다.

장쩌민은 임명된 후 처음으로 경제 특구 연구토론회에서 사회를 보았다. 전 중공중앙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의 비서 롼밍(阮銘)은 “나는 1981년 특구 연구토론회의에서 장쩌민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당시 그는 수출입국 사무실 부주임으로서  회의에서 사회를 보았는데 대부분 쓸데없는 얘기들만 늘어 놓았다. 그는 특구 개방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후야오방의 결정을 감히 반대하지는 못했으므로 애매한 말들을 했다. 그는 나에게 비교적 관료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인상을 주었다”라고 회억했다.

장쩌민을 잘 아는 한 간부는, “장쩌민도 리펑(李鵬), 린한슝(林漢雄), 취자화(鄒家華), 예정다(葉正大) 등 사망한 중공 고위층 간부의 자녀들처럼 아버지의 전우들에 의해 올라온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장쩌민은 사방에서 작업을 벌여 인맥관계를 이용한 기회주의자란 것을 알았다”고 했다.

당시 개혁파와 보수파의 투쟁은 여전히 매우 격렬했으며 장쩌민도 바람 따라 좌우로 흔들렸으나 다행히 나중에 개혁파가 우세할 것을 보아냈기에 판돈을 잘못 걸지는 않았다.

일정한 직위가 있으니 위로 승직하기는 훨씬 쉬웠다. 장상칭과의 관계를 이용해 장쩌민은 아주 순조롭게 장아이핑(張愛萍)이 직접 이끄는 전자공업부 부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나중에는 부장으로 승직했다. 베이징 제1기계공업부 장쩌민의 동료들은 장쩌민이 업무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으나 고위층 노선을 아주 잘 걷는다고 했으며 그는 어떤 사람이나 자신의 출세를 위한 기회에 모두 이용한다고 했다. 장쩌민은 평소 대량의 시간을 들여 중앙급, 부장급 지도자를 찾아다니며 관계를 맺으려고 애썼다.

장쩌민은 작은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자주 꺼내 복습하곤 했는데 거기에는 이용할만한 관리와 그들의 친척들의 생일과 좋아하는 것 등등이 기록돼 있었다. 장쩌민에게는 또 한 가지 재주가 있었는데 현직 중앙간부와 이미 사망한 중앙간부들의 자녀[장쩌민이 나중에 국가 주석으로 승직하는데 중요한 작용을 한 쩡칭훙(曾慶紅)을 포함]들과 아주 익숙하게 지냈다. 1989년 장쩌민이 처음으로 덩샤오핑의 집에 갔을 때 그의 아들에게 물을 따라주고 덩샤오핑에게 슬리퍼를 받쳐주었다는 추문은 지금까지도 태자당(太子黨 역주-공산당 간부의 자제를 일컫는 말)들이 술상에서 한담할 때 꺼내는 이야기로 되었다.

왕다오한과 장아이핑이 밀어준 덕분에 1982년 3월, 장쩌민은 56세 나이에 전자공업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해 열린 중공 제12기 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이 되었다.

장쩌민은 전자공업부에 있는 몇 년 동안 아무런 공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풍류 소문만 많이 전해졌다. 중국 신문에서는 한 도시의 관리가 출국한 기회에 스트립쇼를 보러갔다가 동료들에 의해 검거된 사건을 보도한 적이 있었다. 사실 장쩌민도 80년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라스베가스 윤락가에서 스트립쇼를 보고 매춘하고는 귀국 후 공금으로 결산한적이 있다. 당시 일반 고위층 간부들은 아직 감히 이렇게 대담한 행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소련에서 KGB 미녀 크라바와 놀아난 경력이 있기에 미국 윤락가에서 매춘한 것은 새로운 여자를 맛보는데 지나지 않았다.

장쩌민이 당·정·군 대권을 손에 쥔 10여 년 동안 중국의 매춘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해 서방 자본주의 선진국을 훨씬 초과하게 된 것은 장쩌민과 같은 탐관오리들이 모두 비공개 혹은 반공개적으로 내연녀와 첩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와서 스트립쇼도 고위층 관리들이 해외로 나가서 감상하는 특권이 아닌, 전국 각지에서 범람하는 ‘선진’ 문화로 되었다. 장쩌민의 이일을 풍자하여 인민사이에서는 “남자가 윤락 행위를 하지 않으면 당에 미안하고, 여자가 매춘하지 않으면 장쩌민에게 미안하다”라는노래가 불려졌다.

장쩌민의 야심은  전자공업부 부장까지 되자  더욱 커졌다. 그는 이제는 일반 고위층 관리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부총리나 정치를 관여하고 있는 중공 원로들을 찾았다. 전자 공업부에서는 늘 새로운 양식의 수입 전자제품을 들여왔는데 장쩌민은 업무상 편리를 이용해 칼라TV나 고급 전자제품을 고위층 간부들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는 간부들에게 그의 업무를 지도할 수 있게 사용해 보라고 했다. 장쩌민은 원로 핵심 정치 인물들 앞에서는 자신을 낮추고 심지어 무릎을 꿇고 TV채널을 맞춰 주기도 했다.

당시 장쩌민의 머리 나쁜 동료들은 그런 일은 비서를 보내자고 건의하자 장쩌민은 “이렇게 해야 당의 선배들에게 배울 수 있다”라고 대답했다. 비록 일부 동료들은 장쩌민의 이런 저열한 작풍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장기간의 아부로 신경이 무뎌진 고위층 간부들은 장쩌민을 말할 때면 “업무를 착실하게 한다”고 칭찬했다. 장쩌민은 바로 이러한 수작으로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게 기초를 닦아 놓았다.
다음시간에는 상하이 학생운동에서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아첨하여  한단계  더 오르게 된 장쩌민의 술수를 살펴보도록하자.



對중국 한국어 단파방송 - SOH 희망의소리
11750KHz, 중국시간 오후 5-6시, 한국시간 오후 6-7시

http://www.soundofhop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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