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오페이(趙培 시사평론가)
[SOH] 지난 3월부터 식물인간 상태인 것으로 알려진 장쩌민 전 주석의 건재를 알리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지난달 스타벅스 회장 접견했다거나 양저우 타이저우(泰州) 공항에 기념 문구를 남겼다는 등의 보도가 그것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 같은 보도는 장쩌민파(장파) 중인인 저우융캉에 대한 조사가 중공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결정된 사실을 알게 된 쩡칭훙 전 국가부주석을 비롯한 장쩌민파가 비밀리에 회의를 연 후 해외 장파 중문 매체에 흘린 것이다.
이 소식통은 장파가 해외에서 보도된 장쩌민의 움직임을 역수입해 그의 건재를 과시하고 저우융캉에 대한 조사를 결정한 후진타오 주석을 압박하려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후진타오와 장쩌민은 서로 죽기살기로 싸워야 하는 천적관계일지도 모른다.
후진타오의 원적지는 안후이 지시(績溪), 장쩌민의 원적지는 안후이 징더(旌德)의 강촌으로 직선거리는 30Km 미만이다. 장쩌민은 장수성 양저우(揚州)에서 태어났고, 후진타오는 장수성 타이저우(泰州)에서 태어났다. 두 시는 인접하고 있는데, 산 하나에 호랑이 2마리가 있는 양상이어서 이 두 사람은 최후에 대결할 운명인 듯하다.
두 사람의 갈등은 23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9년 천안문 사건 후, 장쩌민은 총서기가 되었지만 덩샤오핑은 후진타오를 그 다음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같이 세대를 넘은 후계자 지명은 중공 내부에서도 처음이었다. 이것으로 후진타오는 장쩌민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덩샤오핑이 살아있는 동안 장쩌민은 어쩌지 못하고 후진타오는 은밀하게 힘을 모았다.
1996년 후진타오의 출생지인 타이저우가 양저우로부터 독립했다. 이는 장-후 두사람의 대결이 시작된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1997년 2월 19일 덩샤오핑이 병사하자 장쩌민은 은근히 기뻐한다. 1997년 제15회 공산당 대회에서 은퇴를 가까이 둔 차오스(喬石)는 후진타오가 덩샤오핑이 지명한 후계자임을 공개적으로 보여줬다. 동시에 70세를 은퇴연령으로 하는 규칙 제정을 제안하고 장쩌민에게 재임 1기 후 후진타오에게 양보할 것을 강요했다. 이 일은 장쩌민을 불쾌하게 했다.
2002년 후진타오가 총서기가 되었으나, 장이 그림자처럼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전면적으로 장악하지 못했다. 당시 장완녠(张万年), 츠하오톈(迟浩天) 군사부주석은 장쩌민의 군사위 주석 유임을 요구했다. 또 장파는 후진타오 암살을 시도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2006년 황해(黄海) 사건이다. 당시 후진타오가 타고 있던 군함이 2척의 해군 구축함으로부터 사격을 받아 후진타오 가까이에 있던 해군 병사 5명이 사망했다. 장쩌민의 이러한 움직임에도 후진타오는 계속 참았다.
후진타오가 최고 지도자가 된 후 고향의 명칭도 다컹코우(大坑口)촌에서 문화혁명 이전의 룽촨(龍 川)으로 변경됐다. 후진타오 세력의 증강과 함께 원적지도 관광명소가 됐다. 반면 장쩌민의 원적지는 방문자도 없으니, 이것도 후진타오의 우세를 보여주는 것 같다.
올해 저우융캉과 보시라이의 정변 계획에 의해 후진타오는 장쩌민의 최대 약점을 잡아 이를 기회로 장쩌민계 군부 내 세력을 일소하고 철저하게 군대를 장악한다. 숨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한 장쩌민이지만 저우융캉이 열세에 놓일 때마다 언론에 등장해 기세를 되찾으려고 한다. 보시라이 실각을 승인했다거나 군 고위관리들을 접견한 후 공항에 기념 자구를 남겼다는 등의 보도가 그것으로 후진타오에게 주의를 촉구하고 있다. 이는 장파 처리에는 정치세력으로부터 장쩌민을 철저하게 배제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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