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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덩샤오핑이 사망하자 차오스를 사퇴시키고 난폭한 독재 실시

관리자  |  200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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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덩샤오핑의 사망


1997년은 중공 고위층으로 놓고 말하면 아주 중요한 일년이었다.


덩샤오핑이 최후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모습을 보인 것은 1993년 12월, 상하이 양푸(楊浦)대교에서와 설 전날 TV에 나온 것이었다. 덩샤오핑의 쇠약한 모습으로 홍콩 증시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중공 내부에서 덩샤오핑과 사이가 밀접했던 사람들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덩샤오핑의 사무실과 연락만 하고 덩샤오핑을 직접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던 장쩌민은 이번에 덩샤오핑의 모습을 보자 목을 조였던 밧줄이 느슨해지는 듯 했으며 이제는 살만한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장쩌민과 쩡칭훙은 어떻게 하면 더 확실하게 정권을 잡을 것인지에 대해 자주 연구했다. 그들은 자기 세력들을 배치해 지반을 독차지하는 것으로는 모자라며 인심을 널리 사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 몇 년 동안 장쩌민은 각종 부패한 수단으로 사람들을 끌어 들이고 패거리를 묶으면서 고위층 관리들을 매수했다. 장쩌민에게 있어서 ‘부패’는 또 다른 한 가지 용도가 있었는데,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으면 ‘반부패’의 명의로 제거해 버리는 것이었다. 나중에 장쩌민이 정적을 타격할 때 이 방법은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살아있는 한 장쩌민은 일정한 제약을 받았다. 1996년 12월, 오랫동안 파킨슨병을 앓고 있던 덩샤오핑은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했다. 두 달이 지나도 덩샤오핑이 숨을 거두지 않자 장쩌민은 크게 실망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질질 끌면서 죽지 않고 있다가 병세가 호전되기라도 할까 봐 여간 안타깝지 않았다. 덩샤오핑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장쩌민으로 놓고 말하면 매우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1997년 2월 19일 저녁 9시 8분, 덩샤오핑이 끝내 사망했다.


장쩌민 세력들은 즉시 중공 중앙,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국무원, 전국 정치협상회와 군사위원회명의로 ‘전당, 전군, 전국 각 민족 인민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해 장쩌민동지를 핵심으로 한 당 중앙은 반드시 덩샤오핑이 개척한 개혁개방을 계속 추진해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덩샤오핑의 영결식에서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 장쩌민은 발언할 때 목소리를 가급적 비통하게 했으며 효과를 증폭시키기 위해 또 눈물까지 몇 방울 흘렸다. 그러나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장쩌민의 진실한 마음이 어떻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그 때 장쩌민이 눈물을 훔치는 사진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웃음거리로 되고 있다.


영결식이 끝나고 이틀이 지난 후, 군부와 무장부대는 장쩌민의 추도사를 공부해야 했고 “장쩌민을 핵심으로 한 당중앙과 절대적으로 일치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야 했다. 또 2월 25일 인민일보는 사설을 발표했는데 ‘장쩌민을 핵심으로 한 당중앙’이란 문구가 9곳이나 있었다.


2. 차오스를 배척


당시 장쩌민과 쩡칭훙에 의해 낙마한 양상쿤은 이미 91세 고령이었지만 ‘불행히’ 아직 살아있었다. 동생 양바이빙은 군사권은 잃었지만 군인들을 다스릴 권한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모두 장쩌민을 불안하게 했지만 어찌 되었든 일은 순서대로 처리해야 했으므로 차오스(喬石)의 목을 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차오스는 1924년 12월 상하이에서 태어나 16세 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상하이 학생운동을 조직한바 있다. 1945년부터 1949년 사이 상하이 퉁지(同濟)대학 지하당 총지부서기, 상하이 지하당 학생위원회 총책임자, 상하이 지하당 신스구(新市區) 위원회 부서기와 상하이 베이구(北一區) 학생위원회 서기직을 맡았다. 그러나 같은 시기 장쩌민은 어디가 붙으면 좋을지 몰라 우유부단하고 있었다. 중공이 정권을 건립한 후, 차오스는 지방에서 일하다가 1982년 중공중앙 해외연락부 부장, 중앙 조직부 부장, 국무원 부총리, 중앙 기율위원회 서기, 중공 중앙 당간부학교 총장 등을 직무를 맡았다. 또 1993년부터 1998년까지는 제8기 전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 정치국 상무위원직을 맡았다. 중공 내부에는 차오스처럼 학생운동을 이끌다가 공업계통을 책임졌으며 해외연락을 맡았다가 다시 당조직 관리, 정보 관리, 기율 관리를 주관하다 나중에 최고층에 들어간 사람은 아주 드물다. 장기간 지방 관리로 있었던 장쩌민은 물론 열사의 자녀인 리펑, 심지어 원로인 양상쿤, 보이보 등도 그와 비길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경험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장쩌민은 모두 차오스의 상대가 아니었다. 장쩌민은 베이징에 온 뒤, 차오스가 두 세력의 원로인 덩샤오핑, 천윈이 모두 좋아하는 인물임을 단기간 내에 알게 되었다. 중앙 기관의 사람들도 진정한 능력으로 승직했다고 차오스를 평가했다. 찔리는 데가 있던 장쩌민은 이것이 간접적으로 자신을 질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차오스를 증오했다. 사실 차오스는 1985년에 이미 후치리(胡啓立)와 함께 원로들에게 후계자로 내부 지정되었다. 차오스의 침착하고 착실하며 민감하고 과감한 성격은 원로들의 호평을 받았다. 6.4사건 때, 총서기 자오쯔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덩샤오핑은 차오스를 그 대신 발탁하려고 했던바 있다.


장쩌민은 자신의 위치가 차오스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차오스 배후에는 또 법률 계통과 인대위원회의 펑전(彭眞), 완리가 있었다. 장쩌민을 더 불안하게 한 것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차오스를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차오스는 개혁파와 보수파의 원로들의 마음에 동시에 들어 13차 당대표대회 때 후계자로 내정되었다. 또 중공 14차 대표대회에서 차오스는 전체에서 한 표 모자라는 316표로 정치국위원으로 당선되었는데, 그 한 표는 바로 질투심이 강한 장쩌민의 표였다.


베이징에는 장쩌민이 내려가고 차오스가 올라오기를 바라는 민심을 보여주는 ‘강낙석출(江落石出)’이라는 말이 떠돌아 장쩌민을 고뇌하게 만들었다. 양씨 형제들이 낙마하기 전, 장쩌민은 항상 불안해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그가 중공 최고 보좌에 앉은 것은 덩샤오핑이 발탁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원로들이 서로 타협한 결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덩샤오핑은 망설이던 끝에 동의는 했지만 나중에 여러번 그를 잘라버리려 했고, 진정으로 자신을 맘에 들어 하는 리셴녠도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아첨 때문이라는 것을 장쩌민 역시 알고 있었다.


장쩌민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1989년 6월 21일에 찍은 사진을 보았다. 거기에는 제13기 4중 전회 때 승직된 6명 상무위원 장쩌민, 리펑, 차오스, 쑹핑(宋平), 리루이환, 야오이린(姚依林)이 있었고 당시 군사위부주석 양상쿤이 가운데 서있었다. 덩샤오핑의 생각은 뻔했다. 양상쿤이 덩샤오핑을 대신해 대권을 쥐고 있는 것으로 장쩌민은 오리구이 요리 접시에 있는 당근처럼 있어도 없어도 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양씨 형제가 제거되었고 덩샤오핑도 세상을 떠났기에 장쩌민은 담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는 덩샤오핑이 죽은 뒤 자신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으므로 중공의 ‘핵심’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오스는 장쩌민의 생각을 알아주지 않고 잘못을 보면 여전히 사정없이 지적하고 비평했다. 이는 장쩌민으로 하여금 항상 목에 뼈가 걸린 것처럼 불편한 느낌이 들게 했다.


상하이에서 출세하여 상하이 서기 직무를 맡고 있을 때부터 ‘상하이방’을 만들어 악명 높았던 장쩌민은 당정군(黨政軍) 대권을 손에 쥐게 되자 더욱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놓치지 않고 ‘상하이방’ 세력들을 배치했다. 덩샤오핑이 이를 여러 번 비평했고 차오스도 정치국에서 간부를 선발할 때 각 지방에서 고루 선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차오스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장쩌민에게 눈길을 돌렸다.


덩샤오핑이 죽은 뒤, 독일 경제일간지 ‘한델스블라트’에서 차오스를 인터뷰한 기사를 싣자 쩡칭훙은 즉시 사람을 찾아 번역하게 한 후 장쩌민에게 주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차오스가 법률 제도와 인민대표대회를 언급한 외, 기자에게 또 한 가지 일을 강조했답니다”라고 말하고는 일부러 좀 쉬었다가 장쩌민이 조급해 하는 모습을 보이자 말을 이었다. “차오스는 좌파를 반대해야 한다고 했답니다”라고 말했다. 장쩌민은 놀라며 “좌파를 반대한다고?”라고 하며 덩샤오핑이 남방을 시찰할 때, 하마터번 낙마할 뻔했던 위기를 반사적으로 떠올렸다.


1995년 3월 9일, 차오스는 CCTV의 인터뷰를 받을 때, “시장경제는 법제경제이기 때문에 경제 법률은 입법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고 일년 내에 완성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인대 부위원장 톈지윈(田紀雲)도 이에 호응해 “인대 대표는 후보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어야 하며 정부는 신 정책을 국민에게 공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차오스는 또 제8기 인대 3차회의에서 “국가 공무원은 모두 인민의 공복이어지 인민의 머리위에 올라앉아 있는 어르신이 아니다”, “제도적으로 청렴한 정치를 강화해야 하며 그 근본은 법률 제도에 의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쩌민은 차오스의 말이 구절마다 화살이 되어 자신을 겨누고 있는 것 같았다.


덩샤오핑이 죽고 양씨 형제가 꺼꾸러지자 장쩌민을 짓누르고 있던 돌덩이는 제거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법제를 주장하는 차오스가 장쩌민의 새로운 걱정거리가 되었다. 그리하여 차오스를 15차 당대표대회에서 퇴직시키는 것이 장쩌민의 다음 목표가 되었다.


장쩌민은 또 다시 보이보와 이익을 주고 받는 거래를 했다. 보이보는 차오스에게 퇴직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을 약속했고 장쩌민은 보이보의 아들 보시라이(薄熙来)에 대한 ‘관심’은 너무나 부족했다고 사과하면서 ‘고칠’ 것을 약속했다.


1997년 4월 26일, 장쩌민이 차오스의 가장 큰지지자로 생각했던 펑전(彭眞)이 사망했다. 펑전은 예전에 마오쩌둥마저도 속수무책이었다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무서운 펑전이 죽자 장쩌민은 크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3. 문인을 등용


장쩌민이 등용한 3명의 문인 텅원성(縢文生), 왕후닝(王滬寧)과 류지(劉吉) 중, 장쩌민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류지였고 가장 먼 사람은 텅원성이었으며 왕후닝은 장쩌민이 가장 떠받드는 사람이었다. 장쩌민이 쇼를 하는데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이 세 사람에게서 나왔다.


* 중난하이 제일 문필 텅원성


텅원성은 1940년 10월, 후난(湖南)성 창닝(常寧)에서 출생했고 1964년 중국인민대학 중공 당역사 학부를 졸업했으며 중공중앙 서기처 연구실 연구원, 이론연구소 소장, 부주임, 중국 직공(職工)사상정치공작연구회 상무이사, 중공 중앙 고문위원회 부비서를 역임했다. 또 1989년부터는 중앙 정책연구실 부주임직을 맡았다가 나중에 장쩌민에 의해 주임으로 승직했다. 그는 중공 제15기 중앙 위원이었으며 제16차 당대표대회 정치보고를 썼다.


텅원성은 1980년, 중앙서기처 연구실에 있을 때, 전문적으로 진보 인사들을 제거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수집했다. 팡리즈(方励之), 왕뤄왕(王若望), 류빈옌(劉賓雁) 등은 모두 탕원성이 수집한 자료 때문에 당에서 제거되었다. 1987년 9월,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의 지지를 받고 이 연구실을 없앴다.


베이징의 내부 소식에 따르면, 마오쩌둥 연구 전문가인 텅원성은 장쩌민에게 마오쩌둥의 방식대로 정치국을 통제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즉, 권력을 어느 한 측근에게 모두 줄 것이 아니라 2, 3명의 관리가 서로 내부 투쟁을 하게 하고 나중에 장쩌민을 찾아 중재하게 만드는 방식을 가리킨 것이었다.


텅원성이 장쩌민사상에 대한 최대의 공헌은 ‘3강’에 있는 ‘정치를 말한다’ 부분이었다.


* ‘3개 대표’를 쓴 왕후닝


1955년 10월 6일, 상하이에서 출생한 왕후닝은 1995년 중공중앙 정책연구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푸단대 국제정치학부 교수였으며 학생들의 박사과정을 지도했다.


장쩌민이 상하이 서기로 있을 때 이미 왕후닝의 이름을 익숙히 알고 있었으며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작품이 마음에 들어 매우 우러러 보았다. 몇 년 후, 왕후닝이 중앙정책연구실에 발탁되어 처음 장쩌민을 만나러 왔을 때, 총서기인 장쩌민이 그의 작품을 줄줄 외워 깜짝 놀랐다고 한다.


장쩌민이 다른 사람의 글을 외우기 좋아했던 것은 머릿속에 자신의 사상이 없어 다른 사람의 묻는 말에 늘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엉뚱한 대답만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또 자신이 박식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장쩌민이 자신을 내세우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당의 헌장과 헌법에 밀어 넣으려 했던 ‘3개 대표’를 쓴 사람이 바로 왕후닝이다. 장쩌민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느닷없이 다른 사람의 문장을 외우는데 고시(古詩)와 외국 경전으로 얼굴에 금칠을 하려해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되었다.  


왕후닝은 쩡칭훙의 추천으로 중앙정책연구실에 들어갔는데 우방궈(吳邦國)가 그를 장쩌민의 정치 고문으로 추천하려고 생각했다. 우방궈는 베이징에 들어간 뒤 몇 번이나 장쩌민에게 이 일을 말했다. 나중에 왕후닝이 중난하이에 들어가자 장쩌민은 그를 만난 자리에서 농담으로 “당신이 베이징에 안 오면 그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해 장쩌민의 측근인 쩡칭훙과 우방궈가 장쩌민의 무능함을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지 보여주었다.  


왕후닝은 베이징에 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장쩌민을 위해 14기 5중 전회 때 발표할 발언고 ‘12대 관계를 논함’을 썼다.


왕후닝의 최대 공헌은 장쩌민에게 ‘3개 대표’와 ‘시기를 맞춰 앞으로 나아간다[輿時俱進]’는 이론이다. 이는 장쩌민이 자리를 내놓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으며 장쩌민은 자신의 ‘창조적인 논술’인 이 이론을 당장(黨章)과 헌법에 밀어 넣었다. 왕후닝은 장쩌민의 특별 고문으로 있다가 2002년 11월 16차 당대표대회에서 장쩌민에 의해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장쩌민이 자리에서 물러난 후, 중앙정책 연구실 주임을 맡았던 왕후닝은 사회과학원 부원장직을 맡겠다는 요구가 거절을 당하자 또 당간부학교 부학장 자리를 요구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한편 장쩌민은 왕후닝이 ‘3개 대표’를 쓴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누설해 코가 납작해 졌으므로 괘씸해 죽을 지경이었다.


* 왕예핑을 형수라고 부르는 류지


장쩌민 신변에는 입이 되어주는 인물이 류지 한 사람 뿐이 아니었지만 ‘총관리인’ 쩡칭훙, ‘미용사’ 왕후닝 등 사람들도 장쩌민의 앞에서 류지처럼 맘 놓고 행동하지 못했으며 사전에 통보하지 않고 장쩌민의 저택을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했다.


류지는 1935년 10월에 안후이성 안칭(安慶)에서 태어나 칭화대학 수리공정 학부를 졸업했고 졸업한 뒤에는 상하이에 배치되었다. 그는 이공과 출신이었지만 간부 이론을 열심히 연구했다. 장쩌민이 상하이에 있을 때, 류지는 천즈리가 이끄는 상하이시 당위원회 선전부에서 부부장으로 일하다가 1993년, 베이징에서 중국사회과학원 부원장직을 담임했다.


류지는 주로 ‘명주론(明主論)’에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 장쩌민을 진보적인 이미지로 만들려고 했으며 ‘핵심론’과 ‘신권위론’을 주류 사상으로 만들어 장쩌민으로 하여금 권세를 이용해 주먹을 휘두를 수 있게 하고 권력을 확대하게 만들었다.


장쩌민은 왕후닝이 쓴 글을 외우면서 자신의 이론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명주론’은 측근들이 자신의 얼굴에 금칠하기 위해 쓴 것이었으므로 이것만은 외우지 않았다. 장쩌민으로 놓고 말하면 국사(國師)로 모시고 있는 류지에게서 권력투쟁 기예를 교육받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다.


장쩌민이 중난하이에 들어간 후, 류지는 미리 통보할 필요없이 장쩌민의 저택을 마음대로 드나들었는데 경호원도 감히 막지 못했다. 상하이에 있을 때, 류지는 ‘쩌민동지’라고 직접 이름을 불렀으며 베이징에 온 후에야 총서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장쩌민의 아내 왕예핑은 여전히 형수라고 불렀다.


류지는 베이징에 옮겨와 근무하게 된 후, 일반적으로 베이징주재 상하이 사무실에서 밥을 먹었는데 입맛을 바꾸고 싶으면 차에 앉아 곧장 장쩌민의 자택으로 갔다. 왕예핑은 기분 좋으면 직접 주방에서 류지가 좋아하는 강남 요리를 해주기도 했다. 왕예핑이 바빠서 요리를 해주지 못해도 느닷없이 찾아오는 류지에게 이미 습관된 주방 일꾼들이 언제든지 그에게 밥을 차려주었다.


그러나 집정 후기에 류지가 일부 개혁파 지식인들을 공개적으로 지지해 장쩌민은 그를 멀리했고 류지도 나중에 사회과학원 부원장 자리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4. 홍콩 반환


1984년, 영국 수상 마거릿 대처가 당시 중국 정계에서 가장 뛰어나고 개혁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자오쯔양 총리와 97년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겠다는 협정을 체결했다. AFP통신은 1984년 12월 19일, 자오쯔양과 대처가 붉은 카펫 위에서 걷는 장면을 촬영했다. 그러나 국민들이 자기 한 사람만 떠받들기를 바랐던 장쩌민은 자오쯔양의 이 공로를 승인하려 하지 않았으며 국민들이 내막을 알지 못하게 하려 했다. 중공은 그 시기의 선전 중에서 역사를 증명하는 사진 속의 자오쯔양의 모습을 모자이크 처리를 하거나 아예 잘라버렸다. 사실 중공 80년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런 사례는 너무나 많다.


홍콩이 반환되기 전야인 5월, 베이징 정계는 15차 당대표대회 인사 문제로 떠들썩했다. 장쩌민은 선전부에 여론을 크게 조성해 국민들을 모두 홍콩 반환에 주목하게 했다.


차오스는 한 차례 회의에서 “홍콩 반환은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리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다, 반환은 당연한 것이므로 반환식에 참가하는 대표단은 공산당의 이름을 내세우지 말고 정부와 인민대표대회의 배역을 강조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즉, 중공 총서기이며 중앙 군사위 주석인 장쩌민은 베이징에 남아 있으라는 것이었다. 정협 주석 리루이환도 이 주장에 크게 동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홍콩 반환식은 수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으므로 장쩌민은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이 천금같은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게다가 이번 반환식에 참석하는지 여부는 15차 당대표대회 인사 배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었으므로 장쩌민은 기어코 참석하겠다고 고집했다.


그 때 자오쯔양도 반환식에 참가해 대처 부인과 중영 홍콩반환협정에 서명하면서 이루려했던 소원이 현실로 되는 것을 직접 보려 한다고 비서가 알렸다. 그러나 장쩌민은 “웃기네!”하며 책상을 치고 비서에게 뤄간에게 알려 이 일을 구실로 자오쯔양이 밖에 나오지 못하도록 푸창(富强) 골목(역주 - 자오쯔양의 저택이 있는 골목)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라고 명령했다.


중앙선전부 부장 딩관건(丁關根)이 CCTV를 대신해 홍콩 반환 특집프로에서 ‘중영홍콩반환협정’ 조인 장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묻자 쩡칭훙이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는, 주로 덩샤오핑을 내세워 자오쯔양을 덮어 감추되 티가 나지 말게 하라고 했다.


1997년 6월 30일, 들뜬 기분으로 홍콩에 도착한 장쩌민은 ‘노인센터’를 방문해 상하이 노인들과 상하이 말로 마작의 묘기를 담론했고 쇼핑센터에서 양저우(揚州)말도, 광둥말도 아닌 말투로 환영인들과 인사하면서 “내가 이 사람과 악수하고 저 사람과 악수하지 않는다면 기분 나쁘겠지요?”라고 농담까지 했다. 그리고는 한 소녀에게 광둥말을 알아듣기는 해도 말하는 데는 서툴다고 실토를 했다. 그러나 서툴면 흉내를 내면서라도 주목을 끌고 싶어 하는 것이 장쩌민의 본색이라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홍콩 사람들은 영국의 신사풍격과 영국 왕실의 우아한 거동, 그리고 정무국 국장 천팡안(陳方安)의 예의있는 미소를 늘 보아 왔기에 국가 주석의 명의를 가진 장쩌민이 그처럼 자중하지 않는 것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이마가 찌푸려졌다.


같은 날, 선전(深圳)에서 홍콩 주둔부대 환송식이 진행되었고 군사위 부주석 류화칭(劉華淸)이 출발을 앞둔 군인들에게 연설했다. 이튿날 새벽, 홍콩 주둔부대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먹구름이 뒤덮인 홍콩으로 들어갔다.


홍콩 반환식은 6월 30일 23시 42분부터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측 대표 국가주석 장쩌민, 국무원총리 리펑, 국무원 부총리겸 외교부장 첸치천(錢其琛), 중앙군사위부주석 장완녠, 홍콩 특별 행정구 첫 행정장관 둥젠화(董建華)와 영국측 대표 찰스 왕세자, 블레어 총리, 로빈 쿡 외무장관, 마지막 총독 크리스 패튼, 찰스 거스리 총사령관이 동시에 식장에 입장했다. 1984년 반환협정을 체결했던 두 주인공 중 영국 대처 수상만이 현장에 있었고 다른 한 주인공인 자오쯔양은 그 시각 장쩌민에 의해 가택 연금을 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감시에 나선 경찰도 전보다 더 증가했다.


1997년 7월 1일 0시, 중국 국기와 홍콩 특별 행정구기가 동시에 게양되었고 양국 정부는 반환 성명에 따라 순조롭게 반환식을 진행해 나아갔다.


당일 오후, 홍콩 특별 행정구 반환 경축대회가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홍콩 반환식에서 중점 인물이 된 장쩌민이 국가주석의 명의로 연설을 발표하고 자오쯔양이 체결한 반환성명에 있는 ‘일국양제(一國兩制)’, ‘홍콩인이 홍콩을 다스린다’, ‘고도의 자치’, ‘50년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은 중앙정부의 장기적인 기본 방침’등을 다시 강조했다.


그러나 장쩌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홍콩의 하늘은 적색(역주 - 공산당을 의미)으로 변하고 말았다. 홍콩 특별구 행정장관은 반드시 베이징에서 지정해야 했고 정책 역시 중앙이 허락해야만 시행할 수 있었다. 홍콩 정부는 베이징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민중의 언론 자유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의 하나였던 홍콩은 중앙에 손을 내밀어 돈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정도로 경제가 하락해 번영과 자유로 넘쳤던 ‘동방의 진주’는 빛을 잃고 대신 시민들의 원성이 넘쳤다. 2003년, 홍콩 특별구 행정장관 둥젠화는 장쩌민의 뜻에 따라 악법 23조 입법을 통과시키려 했으나 홍콩 시민들은 반발을 일으켜 백만 명이 거리에서 항의 시위를 했다.


자오쯔양을 누르고 언론의 하이라이트를 한 몸에 받은 97년 홍콩 반환식은 장쩌민의 허영심을 크게 만족시켜 주었다. 좋은 일에는 빼놓지 않고 앞장서나 좋지 않은 일을 만나면 뒷걸음 치는 것은 원래 장쩌민의 성격이므로 이는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5. 두 번째 미국 방문


1997년 7월 8일, 나토가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맹국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해, 전 공산국가 폴란드, 헝가리와 체코가 나토에 가입했다. 이처럼 자유사회는 계속 동쪽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같은 해 10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장쩌민은 두 번째 미국 방문을 시작했다. 출발 전 장쩌민은 미국이 중국 인권을 질책할까 봐 매우 걱정했다. 장쩌민이 올라간 뒤, 중국의 정치개혁은 정지되었고 인권은 계속 악화되어 대량의 민주인사들을 체포되었으며 민주에 대한 분위기는 6.4사건 전보다 크게 퇴보했다. 미국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 장쩌민은 꾀를 써, 출발하기 전날 ‘경제, 사회 및 문화 권리 국제협약’을 비준했다. 이 협약은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존엄, 평등 및 기타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는 것을 승인하는 협약이었다. 동시에 신화사도 이례적으로 “중국 사회에 여전히 인권을 유린하는 현상이 존재한다”도 승인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장쩌민이 인권을 존중한다고 여긴다면 그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장쩌민은 헌법이 규정한 신앙, 결사, 집회, 행진, 시위의 자유도 마음대로 짓밟는데 한 개 국제 협약이 이 독재자의 손발을 묶을 리 만무했다. 장쩌민은 미국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집적 신화사의 이 보도를 부인했으며 또 공공라디오방송(PBS) ‘뉴스아워’ 프로그램 사회자 짐 레러와의 인터뷰에서 “인권 영역에서 중국은 잘못된 점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 주 동안의 방미 일정에서 장쩌민은 자신의 독재본성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당시 백악관 근처 라파예트(Lafayette)공원에는 2천여 명 시위자들이 중공의 ‘인권유린’을 질책하며 장쩌민에게 항의하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민주인사, 티베트인, 내몽고인, 대만인, 공회 지도자, 어린이노동 반대자, 환경 보호주의자 등이 포함되었다. 장쩌민은 억지로 신사다운 척 하며 “나는 미국 국민의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있는데 때로는 불필요한 잡음이 귀에 들린다...나도 미국에서는 부동한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번 방문을 통해 나는 이점을 직접 체험했다”고 말했다.


장쩌민은 항의의 목소리를 잡음이라고 했는데 이는 그가 민중이 왜 항의하고 있는지, 그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알고 싶어한 적이 없다는 것을 설명했으며 미국에 와서야 ‘부동한 관점을 말하는 것’을 체험해보았다고 한 것은 국내에서 그가 항의의 목소리를 얼마나 잔혹하게 짓눌러 버렸는지 잘 설명해 주었다.


보스턴 하버드대학에서 연설할 때 그는 또 한번 독재자의 진실한 면모를 드러냈다. ‘뉴스위크’지의 한 기자가 장쩌민에게 밖에서 항의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응을 묻자 그는 “나는 연설을 하면서 바깥의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들보다 목소리를 더 크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안하무인식의 독재자 장쩌민은 이와 같이 민중들의 목소리를 들을 성의가 티끌만큼도 없었다.


장쩌민과 선명한 비교가 되는 것은 1998년 중국을 방문한 클린턴 대통령이었다. 당시 베이징대학에서 한 학생이 그에게 “장쩌민주석이 하버드대학에 갔을 때, 항의 시위에 부딪혔는데 만약 오늘 당신에게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클린턴 대통령은 “나는 시위자들과 만나 그들의 의견을 들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자주 국민들의 항의를 받곤 한다”고 대답했다.


클린턴은 연극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처럼, 간단한 문답을 통해서도 사람들은 독제 체재와 자유사회에서 민중과 최고지도자가 전혀 다른 심태와 사유방식을 가지고 있음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6. 인질 외교


장쩌민은 귀국 후, 클린턴에게 잘 보이기 위해 민주인사 웨이징성(魏京生)을 석방했다.


웨이징성은 고위급 관리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시단(西單) 민주의 벽’(역주 - 1979년부터 베이징 시단 거리에는 중공지도자와 사회주의제도를 비판하는 대자보와 글들이 대량으로 나타나기 시작해 민주의 벽으로 불리게 되었다)에 덩샤오핑을 비판하는 글 ‘민주인가, 새로운 독재인가’를 발표해 체포되어 1979년에 ‘반혁명’ 죄로 15년 판결을 받았다. 그는 먼저 사형수를 가두는 감옥에 8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나중에는 독방에 거의 5년 동안 있었다. 웨이징성은 조건이 악렬한 탕산(唐山) 감옥과 칭하이(靑海) 강제노동 농장에서 감옥 경찰과 범죄자들에게 갖은 시달림을 받다가 1993년에야 처음으로 석방되었다.


1994년, 중국을 방문한 미국 국무조리 존 샤툭(John Shattuk)이 중공과 담판하기 전 먼저 웨이징성을 만나 시국에 대한 견해를 청취했다.


중국 정부가 1993년 웨이징성을 사전에 석방한 것은 2000년 올림픽 유치 경쟁에서 국제사회에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이미지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샤툭이 웨이징성을 만나자 질투심이 생긴 장쩌민은 노발대발하면서 다시 그를 체포해 14년 중형을 내렸다. 2000년 베이징 올림픽 유치는 나중에 북한과의 반목으로 한 표가 모자라 실패했다.


미국은 웨이징성이 또 다시 감금된 것이 그 차례 회견과 관련있다는 것을 알고 미안한 마음과 더불어 도의적인 책임을 지려했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 베이징과 접촉할 때마다 미국은 웨이징성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1997년 클린턴과 장쩌민의 회담에서는 더욱 중점 문제로 거론되었다.


장쩌민으로 놓고 말하면 웨이징성을 석방하는 것은 미국의 환심을 사는 지름길이었다. 웨이징성을 증오하는 덩샤오핑도 죽었고, 그를 석방해도 불쾌해 할 사람이 없었으며 오히려 장쩌민이 클린턴의 체면을 세워준 셈이 되었다.  


1997년 11월, 웨이징성은 18년 감옥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감방에서 집적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어찌됐든지 적지 않은 외국인들이 이러한 속임수에 넘어가 장쩌민을 진보적인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 때부터 장쩌민은 자국민을 이용한 ‘인질외교’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해 1998년에는 6.4천안문 학생운동 주역 왕단(王丹)도 ‘보석치료’의 명의로 미국에 쫒아냈다.


그러나 몇몇 유명한 인물들을 석방했다고 해서 장쩌민의 감옥에 있는 정치범이 줄어든 것은 절대 아니었으며 오히려 날마다 늘어만 갔다. 미국이 중공에 석방을 요구하는 정치범 명단도 갈수록 길어졌다. 중공은 국제상에서 모종 이익을 구하려 할 때마다 몇 사람을 석방해 진보적임을 표시했다. 그러나 즉시 더 많은 사람을 체포해 서방 사회와의 담판에 이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둔다.


이처럼 자국민을 인질로 이용해 다른 국가를 협박하는 수법은 중공에서도 장쩌민이 처음이었다. 국민들의 언론 자유를 박탈하고 과감히 진실한 말을 하는 사람을 해외로 쫒아내면서도 중공은 반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오히려 인권을 자랑하고 독재자의 진보를 과시하는데 이용하면서 자유세계를 속이는 현상은 현재 중국 사회의 현주소라고 말할 수 있다.


7. 차오스의 퇴직


15차 대회 인사 배치는 홍콩이 반환된 후에도 불투명했다. 그 중에서 가장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은 차오스의 퇴직 문제였다. 89세의 보이보는 불편한 두 다리를 끌고 차오스를 찾아가 15차 대회에서는 70세를 간부 유임 연령 표준으로 결정할 것이라며 71세인 차오스를 설득해 퇴직시켰다. 그러나 같은 연령의 장쩌민은 여전히 ‘핵심’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차오스는 퇴직에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에 전혀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해 장쩌민, 쩡칭훙을 놀라게 했다. 이는 예상 밖이었으며 입장을 바꿔 보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차오스의 은퇴는 장쩌민의 15차 대회 인사 배치에 길을 열어 주어 신임 중앙위원이 56%에 달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장쩌민과 그의 측근들의 검토를 거쳐 올라온 인물들이었다.


총을 만져본 적이 없는 장쩌민에게 남은 또 한 가지 걱정거리는 바로 군대 내에 인맥이 없는 것이었다. 장쩌민은 아무리 애써도 덩샤오핑이 그에게 배치해준 군부 인물 양상쿤, 류화칭, 장전처럼 세력이 강하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 키워온 감정적인 기초가 있었기에 장쩌민은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러자 보이보가 꾀를 내 주었다. 그는 “당이 총(군대)을 지휘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군인이 있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유례가 없지만 고칠 것은 고쳐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15차 대회부터 군인들은 정치국상무위원회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장쩌민은 큰 난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장쩌민은 날 것만 같았다. 위에 있던 시어머니가 없어진데다 마음 속에 박혔던 못마저 뽑아 버려 이제는 정말 명실상부한 ‘핵심’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차오스는 은퇴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내놓았다. 하나는, 웨이젠싱(尉建行)을 중양기율위원회 서기로 임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톈지윈의 인대 부위원장직을 보존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기에 장쩌민은 즉시 동의했다.


그러나 차오스는 쉽게 물러서지는 않았다. 은퇴하기 전, 그는 공개적으로 한 가지 소식을 공개했는데 즉, 후진타오(胡錦濤)가 제4세대 지도자의 핵심이며 이는 덩샤오핑과 선배 혁명가,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정치국위원들이 전략적으로 배치한 것이라는 것과 이미 각 방면 인사들의 의견과 제안을 수렴한 뒤 조직에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이었다.


차오스, 리루이환과 완리 등은 여러 장소에서 모두 전에 덩샤오핑과 정치국상무위원회에서 후진타오를 제4세대 지도자 핵심으로 정했으며 정치국을 통과했기에 합법적이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들이 이 내막을 알린 목적은, 후진타오가 올라오는 것이 합법적이라는 것을 알리고 이 결정을 뒤엎는 행위는 모두 불법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장쩌민은 감히 덩샤오핑의 뜻을 배반하고 후진타오를 올라오지 못하게 할 담은 없었으므로 차오스, 리루이환과 완리는 덩샤오핑을 이용해 장쩌민을 내려 보내려고 했다. 차오스의 공개 발언은 장쩌민을 극히 불쾌하게 했으므로 중앙 서기처, 중앙 판공실 등 중앙 각 관련 부서에서는 모두 내부 자료에 이 내용을 싣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차오스는 당내 정치 활동이 매우 정상적이 아니라고 질책했다.


은퇴 직전 차오스의 일련의 움직임은 장쩌민을 덩샤오핑이 건립한 게임 규칙에 얽매이게 했고 장쩌민은 70세란 이유로 차오스를 퇴직시켰으나 차오스도 이 규정을 들고 장쩌민에게 한 임기만 더 유지한 뒤 권력을 후진타오에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5년 후, 장쩌민은 이 규정 때문에 권력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권력을 탐내는 장쩌민은 차오스를 골탕 먹이려고 했으나 결국 자신이 판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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