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H] 장푸전(張付珍, 38, 여). 그녀는 산둥(山東)성 핑두(平度)시 센허(現河) 공원 직원이었다. 2000년 11월, 그녀는 파룬궁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베이징에 갔다가 납치당했다. 내막을 아는 사람이 전하길, 중국 경찰은 강제로 장푸전의 옷을 벗기고 머리를 깎은 후 학대하고 모욕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그녀를「大」자 형으로 침대에 묶어놓은 후 대소변을 모두 침대에서 보게 하였으며 강제로 이름 모를 독주사를 놓아 정신이상으로 만들었다. 이후 그녀는 고통스럽게 발버둥치다가 세상을 떠났다. ‘610’ 관리들이 모든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명혜망 2004년 5월 31일)
양리룽(楊麗榮, 34, 여)은 허베이(河北)성 바오딩(保定)시 베이먼가(北門街) 출신이다. 경찰은 그녀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그녀의 가족들을 늘 괴롭히고 협박하였다. 계량국(計量局) 운전수였던 그녀의 남편은, 부인이 단지 파룬궁 수련생이라는 이유로 직장에서의 해고 압박과 경찰의 압력을 감당할 수 없어서 늘 괴로워 하였다. 2002년 2월 8일 밤, 정신적 압박으로 괴로워하던 남편은 집에 부모님이 안 계신 사이에 양리룽의 목을 졸랐다. 양리룽은 이렇게 10살 난 아들을 남겨두고 처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남편은 그 후 경찰에 자수했다. 경찰은 현장에 도착한 후 아직도 체온이 남아있는 양리룽을 해부하고 많은 장기들을 가져갔다. 내장을 꺼낼 때 아직도 뜨거운 기운이 남아 있었으며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바오딩시 공안국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건 죽은 사람이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해부하는 것 같다!” (명혜망 2004년 9월 22일)
헤이룽장(黑龍江)성 완자(萬家) 노동교양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임신 6~7개월 된 한 여성의 두 손을 강제로 대들보에 묶은 후, 발 밑에 있던 의자를 치워 온몸이 공중에 둥둥 뜨게 만들었다. 대들보는 바닥에서 3미터 정도 높이였는데 굵은 밧줄의 한 끝은 대들보 도르래에 걸려있었고 다른 한쪽 끝은 악독한 경찰이 잡고 있었다. 경찰이 손을 잡아 당기면 매달린 사람은 허공에 둥둥 떴고 손을 놓으면 즉시 아래로 떨어졌다. 이 임신부는 이러한 고문에 시달리다가 결국 유산하였다. 더욱 잔인한 것은 경찰이 그녀의 남편에게 바로 옆에서 그녀가 고문 당하는 장면을 보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명혜망 2004년 11월 15일, 완자 노동수용소에서 백여일 동안 고문을 받은 왕위즈(王玉芝) 여사의 인터뷰 중에서)
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이런 참혹한 사건들이 바로 지금도 중국에서 박해 받는 파룬궁 수련생들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5년이 넘게 지속된 박해 과정에서 발생한 무수한 참혹한 사건들에 비하면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공산당은 국제 사회에서 바르고 개방적인 모습을 부각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파룬궁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비이성적인 박해는 그 광범위성, 심각성, 잔인한 수단 때문에 국제사회에 다시 한번 중국 공산당의 진실한 면을 보여주었으며 중국의 최대 인권 문제로 떠올랐다. 중국인들은 이 모든 책임이 중국 경찰의 낮은 자질 때문이라며 습관적으로 책임을 미루고 있고 중국 공산당은 좋게 변하고 있으며 진보하고 있다고 잘못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 최상위기관에서부터 최하위기관까지 전면적이며 체계적인 잔혹한 파룬궁 탄압은 사람들의 환상을 철저히 깨뜨려버렸다. 많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피비린내 나고 황당한 박해가 중국에서 발생할 수 있었는지 사고하기 시작하였다. 20년 전 문화대혁명 시기,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아 정상을 회복’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오늘 또 다시 역사의 악순환에 빠져 들었는가? ‘진선인(眞善忍)’을 원칙으로 하는 파룬궁이 세계 60여 개국에서 널리 전해지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오직 중국에서만 박해 받고 있는가? 이 박해 속에서 장쩌민과 중공은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
장쩌민(江澤民)은 덕(德)이 없고 무능하다. 만약 중국 공산당이라는 정교하고 확실하며, 전문적으로 살인과 거짓을 일삼는 폭력기계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는 절대로 전 중국, 심지어 해외까지 파급된 집단학살을 발동할 능력이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중국 공산당에게 장쩌민과 같은 고집스럽고 사악한 독재자가 없었다면 중공은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장쩌민과 공산당이라는 사악한 영체(靈體)가 서로 호응하고 공명(共鳴)한 것은, 마치 눈 덮인 산에 등반하는 사람의 목소리와 적설(積雪)이 함께 진동하여 눈사태가 발생하는 것과 같다. 장쩌민과 중공은 상호 이용하여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사악한 탄압을 확대시켰다.
장쩌민과 중공의 수치스러운 과거사가 위기감 가져와
장쩌민은 1926년에 태어났다. 중국 공산당이 줄곧 인민들에게 피비린내 나는 과거사를 속인 것처럼, 장쩌민도 줄곧 중공과 인민들에게 자신의 매국노 역사를 덮어 감췄다.
장쩌민이 17세 되던 해, 세계 세계 반(反)파쇼 전쟁은 이미 불같이 타올랐다. 애국청년들이 잇달아 전선으로 달려나가 항일구국운동에 참여할 때, 장쩌민은 오히려 왕징웨이(汪精韋) 괴뢰정부가 1942년 난징(南京)에 설립한 중앙(中央) 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각 방면의 조사 결과 그 원인이 밝혀졌다. 장쩌민의 아버지 장스쥔(江士俊)은, 일본이 장쑤(江蘇)성을 점령했을 때 일본군의 반중(反中) 선전기구의 고급관리였으며 진정한 매국노였던 것이었다.
나라를 팔아먹고 일본의 노예가 되는 방면에서 장쩌민과 중공은 동일한 전철을 밟았다. 따라서 그들은 중국 인민에 대한 애정이 결핍되어 함부로 인민을 학살할 수 있었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장쩌민은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 중국 공산당에 섞여 들어갔다. 나중에 숙부인 장상칭(江上靑)이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산적들이 난사한 총에 맞아 숨지자, 장쩌민은 이 관계를 이용하기 위하여 자신은 일찍이 숙부에게 양자로 보내졌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 거짓말로 인하여 장쩌민은 몇 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처장(處長)급 간부에서 전자공업부 부부장(副部長)으로 승진하였다. 모두들 알다시피 장쩌민의 승진은 능력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이용해 권세에 빌붙은 것이다. 장쩌민이 상하이(上海)시 위원회 공산당 서기로 있던 기간에는 매년 상하이에 와서 구정을 보내던 리센녠(李先念), 천윈(陣雲) 등 공산당 원로들에게 아첨하는 장기를 보여주었다. 일찍이 장쩌민은 리센녠에게 생일 축하떡을 보내기 위해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라는 신분으로, 대설(大雪)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 동안 밖에 서서 리센녠을 공손히 기다린 적도 있었다.
1989년 6월 4일, 톈안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학생들을 학살한 사건은 장쩌민의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바른소리를 보도하는『세계경제도보(世界經濟導報)』를 폭력으로 탄압하였고, 중국 인민들의 신임이 높던 인민대(人民大) 위원장 완리(萬里)를 연금하였으며,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여 중공 총서기가 되었다. 장쩌민은 학살 직전에 덩샤오핑(鄧小平)에게 비밀편지를 보내 ‘과감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렇지 않을 땐 ‘당도 망하고 나라도 망할 것이다’라고 조언하였다. 89년 정권을 잡은 이후 15년 동안, 장쩌민은 ‘안정이 일체를 압도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의견을 가진 일체 인사와 독립적인 신앙단체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학살하였다.
중국과 러시아 쌍방은 1991년부터 시작하여 국경을 확정짓기 시작했는데, 장쩌민은 제정(帝政) 러시아와 구(舊) 소련의 중국에 대한 침략을 전면적으로 승인하였으며 전면적으로『아이훈 조약(愛琿條約)』에서부터 시작된 모든 중.러 불평등 조약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팔아먹은 중국 영토가 백여만 ㎢에 달한다.
장쩌민의 경력을 간단히 살펴보면,
1) 그는 매국노의 장자(長子)로 태어나 열사(烈士)의 고아를 사칭하여 공산당의 ‘속일 편(偏)’ 비결을 직접 실천하였다.
2) 6.4 학살을 지지하고 민주화 운동인사와 신앙인들을 탄압하여 공산당의 ‘죽일 살(殺)’ 비결을 직접 실천하였다.
3) 중국 공산당이 일찍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의 극동지부로서 곳곳에서 소련의 명령을 들은 것처럼 장쩌민은 무상으로 러시아에 국토를 헌납하여 공산당의 ‘팔 매(賣)’ 비결을 직접 실천하였다.
이와 같이 장쩌민과 중국 공산당은 모두 부끄러운 과거사가 있었으므로 양자 모두 필연적으로 권력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을 늘 안고 있었을 수밖에 없었다.
장쩌민과 중공은 공통적으로 ‘진선인(眞善忍)’ 두려워 해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역사는 1억이 넘는 사람들의 피로 쓰여졌다. 거의 모든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모두 스탈린 식의 숙청이 있었다.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였는데 보통 백만, 천만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에서 급변이 일어난 후 공산진영은 하룻밤 사이에 강산 절반을 잃어버렸다. 중공이 여기에서 얻은 교훈은 바로 탄압을 중지하고 언론자유를 인정하면 공산당은 저절로 멸망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언론을 풀어놓으면 피비린내 나는 폭행을 어떻게 덮어 감추겠는가? 의식형태 방면의 속임수는 어떻게 둘러댈 것인가? 만약 탄압을 중지하면 인민은 공포스러운 위협이 없어지므로 공산당 이외의 생활방식과 신앙을 선택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공산당이 의지하여 존재하는 사회기초는 어떻게 되겠는가?
중국 공산당이 아무리 변해도 그 본질을 개변하지는 못한다. 때문에 민중에 대한 속임수는 끝까지 유지해야 하며 인민에 대한 탄압도 끝까지 해야만 한다. ‘6.4’ 이후 ‘일체 불안정한 요소를 싹부터 소멸시키자’는 외침이 나온 것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장쩌민이 얻어낸 결론이었다.
이때 마침, 중국에서는 파룬궁(法輪功)이 나타났다. 비록 초기에 파룬궁이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데 특수한 효과가 있는 기공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사람들은 점차 파룬궁의 핵심이 간편하고 배우기 쉬운 5가지 공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선인(眞善忍)’을 지도사상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될 것을 가르치는 데 있음을 주목하였다.
(1) 파룬궁은 ‘진실, 선량, 인내[眞善忍]’을 중시하고, 공산당은 ‘거짓, 사악, 투쟁[假惡鬪]’을 중시한다
파룬궁은 ‘진(眞)’을 제창하는데, 이는 참된 말을 하고 진실한 일을 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중공은 줄곧 거짓말과 세뇌에 의거하였다. 만약 사람마다 참된 말을 한다면, 민중은 중국 공산당이 원래 소련에 의지하여 살인, 납치, 도망, 아편 재배, 거짓 항일투쟁 등으로 일어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중공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큰 일을 해내지 못한다’며 정권을 건립한 후 또 여러 차례 운동에서 수많은 피의 빚을 졌는데, 파룬궁의 ‘진(眞)’의 확산은 중공으로 놓고 말하면 그야말로 종말이 눈앞에 닥친 것이다.
파룬궁은 ‘선(善)’을 제창하는데, 일에 부딪히면 항상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언제나 선하게 사람을 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공산당은 줄곧 ‘잔혹한 투쟁, 무정(無情)한 타격’을 제창해 왔다. 중공의 모범영웅 레이펑(雷鋒)은 ‘적에 대해서는 엄동설한처럼 냉혹하고 무정하게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중공은 적에 대해서만 그렇게 대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람에 대해서도 잘 대해주지 않았다. 중공의 개국(開國)원로, 원수, 국가주석을 포함하여 모두 인정사정 없는 비판, 악독한 구타, 각종 고문을 당했다. ‘계급의 적’에 대한 도살은 더욱더 사람을 몸서리치게 한다. 만약 ‘선(善)’이 사회에서 우세를 보인다면 ‘악(惡)’을 기초로 하는 그런 군중운동은 나타날 방법이 없을 것이다.
『공산당선언』에서는 ‘지금까지 일체 사회의 역사는 모두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했다. 이것은 공산당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대표한다. 파룬궁은 모순이 나타났을 때 안으로 자신의 잘못을 찾으라고 가르치는데 이런 세계관은 의심할 바 없이 안으로 자신을 반성하는 것으로 밖을 향해 투쟁하는 중공의 철학과는 뚜렷이 대립된다.
투쟁은 확실히 공산당이 정권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주요 수단이다. 주기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정치운동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자기를 끊임없이 충전하고 ‘혁명투지가 흘러넘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폭력과 거짓말을 끊임없이 강화하고 끊임없이 익숙하게 하는 과정은 바로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공포감을 새롭게 주어 통치를 유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의식형태 상에서 말할 때, 공산당이 의지하여 생존하는 ‘철학’과 파룬궁의 가르침은 뚜렷이 대립된다.
(2) 믿음은 사람을 두려움 없게 만들지만 중공은 도리어 공포에 의존해 정권을 유지
진리를 인식하고 장악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기독교는 거의 3백년에 가까운 박해를 겪었다. 로마황제는 무수한 기독교도들의 머리를 베었고, 불에 태워 죽였으며, 물에 빠뜨려 죽였고, 심지어 직접 사자 먹이로 던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기독교 신도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역사상 불교가 법난(法難)을 겪을 때도 모두 유사하게 굳건한 표현이 있었다.
무신론을 선전하는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바로 사람들에게 천국과 지옥이 없고 선악에 보응이 없다는 것을 믿게 함으로써 양심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며, 방향을 바꾸어 현실의 영화(榮華)와 향락을 중시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이때 인성(人性) 중의 약점을 조작할 수 있으며 협박과 재물에 의한 유혹도 충분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인은 생사를 꿰뚫어 볼 수 있으며 속세를 간파할 수 있으므로 속세의 유혹과 생명의 위협은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따라서 신앙인이 늘어나면 공산당은 사람을 통제할 힘을 잃는다.
(3) 파룬궁의 높은 도덕적 표준을 중공은 감당하지 못해
1989년 ‘6.4’이후, 중공의 의식형태는 철저히 무너졌다. 특히 1991년 8월 소련공산당이 와해된 것과 잇따른 동유럽의 거대한 변화는 중공에게 극도의 공포와 압력을 주었다.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형세는 공산당 통치의 합법성과 전에 없던 생존의 도전을 받게 하였다. 이때 중공은 이미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주의의 원래 교지(敎旨)로는 당원들을 단속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전면적으로 부패를 통해 당원들의 충성심을 얻는 데로 방향을 바꾸었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당을 따라가기만 하면 당은 탐오(貪汚) 등의 방식을 통해 당원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이익을 얻게 허용하였다. 특히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南巡) 이후, 중국은 관청 브로커에서부터 부동산과 주식 투기까지 횡행하였고, 첩을 얻으며, 도처에서 밀수를 하고, 음란물ㆍ도박ㆍ마약이 만연하였다. 비록 ‘훙둥현(洪洞縣) 안에는 좋은 사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민중들은 중공의 반(反)부패 운동을 믿지 않으며 중간, 고급간부의 부패비율이 절반이상을 차지한다고 여긴다.
이때 파룬궁 수련생들이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하면서 펼쳐보인 도덕적인 풍모는 민중들에게 아직까지 남아있던 내심의 선량함을 움직였으며 억만 민중들이 존경하고 수련에 참여하게 하였다. 파룬궁이라는 이 도덕적인 거울은 중공의 일체 바르지 못한 것을 비추었던 것이다.
(4) 파룬궁의 발전과 관리방식이 중공의 질투 자아내
파룬궁의 발전방식은 사람이 사람에게 전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였으며 취한 관리방식은 오고 가는 것이 자유롭고 느슨한 관리였다. 이는 중공의 엄밀한 조직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중공의 매주 한 차례나 여러 차례 정치학습과 조직생활은 유명무실하였다. 공산당의 의식형태에 대한 당원들의 일체감은 거의 영(零)에 가까웠지만 파룬궁 수련자들은 자각적으로 ‘진선인’을 실천하였다. 동시에 파룬궁의 심신건강 개선효과는 수련인 숫자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했고, 수련자들에게 자발적으로 리훙즈(李洪志) 선생의 저작을 학습하게 했으며, 자비(自費)를 들여 파룬궁을 널리 전하게 하였다. 불과 7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파룬궁은 무(無)에서부터 시작하여 1억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중국의 거의 모든 공원에서는 아침마다 파룬궁 연공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공산당은 파룬궁이 중공과 군중을 놓고 ‘다툰다’고 여겨 ‘종교’라고 하는데, 사실 파룬궁이 사람들에게 가져다 준 것은 일종의 문화이며 중국사람들이 오래 전에 잃어버린 조상들의 문화와 전통의 뿌리였다. 장쩌민과 공산당이 파룬궁을 이렇게 무서워하는 이유는, 이런 전통적인 도덕이 일단 군중과 하나로 융합하는 날이면 어떠한 힘도 그 신속한 확장추세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 백성들의 이런 타고난 전통을 수십 년 동안 억지로 단절시키거나 왜곡시켜 왔다. 하지만 다시 새롭게 전통을 만회하는 자체는 바로 역사의 선택이자 광대한 군중들이 고난을 겪은 후 스스로 선택한 회귀였다. 이런 필연적인 선택의 결과는 바로 시비를 똑똑히 가리고 사악함을 버리는 것인데, 다시 말하자면 공산당이라는 한 세트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과 버림이었다. 이것은 중공의 사혈(死穴)을 찍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특히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 수가 중국 공산당 당원 수를 초과했을 때 중공의 마음속 공포와 질투는 생각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중공은 사회에 대해서는 끝까지 통제해 왔다. 농촌에는 ‘마을마다’ 공산당 당지부가 있고, 도시에서는 당지부가 가도(街道) 판사처까지 깊이 들어와 있으며, 군대와 정부, 기업의 가장 뿌리층까지 모두 당조직이 있다. 이런 절대적인 독점성과 배타성은 중공이 정권을 유지하는 주요수단이며 『헌법』에서는 ‘당의 가르침을 확고하게 따른다’는 미명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파룬궁 수련자는 분명하게 공산당의 가르침보다는 ‘진선인’을 표준으로 할 것을 더 원했다. 중공이 볼 때는 이는 절대로 접수할 수 없는 것이며 바로 ‘당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5)파룬궁의 ‘유신론’이 공산당 집권의 합법성에 위험하다고 여겨
유신론(有神論)은 중공이 볼 때 중대한 도전임에 틀림없다.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합법성의 근원은 바로 이른바 ‘유물역사주의’이다. 이 이론으로는, ‘인간천국(유토피아)’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선봉대’인 ‘공산당’의 가르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동시에 ‘무신론(無神論)’은 도덕과 선악을 공산당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게 했으며 이 때문에 근본적으로 진정한 도덕과 선악을 말할 수 없었다. 민중은 오직 당이 영원히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정확하다’는 것을 기억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유신론은 민중에게 변하지 않는 선악의 표준을 알려주었으며, 파룬궁 수련자들은 한 가지 일이 옳고 그름을 ‘진선인(眞善忍)’으로 가늠한다. 이것은 중공의 일관적인 ‘통일사상’에 분명한 장애였다.
만약 총결론을 도출해 내자면 아직도 많은 원인이 있다. 그러나 상술(上述)한 5가지 원인 중 어느 하나도 중공으로서는 모두 아주 치명적이다. 사실 장쩌민이 파룬궁을 탄압하는 것도 똑같은 원인에서 출발한 것이다.
장쩌민은 경력을 속여서 일어났으므로 당연히 ‘진(眞)’을 무서워 한다. 또 민중을 탄압하여 벼락출세를 했기에 당연히 ‘선(善)’을 싫어한다. 서로 물어뜯고 아귀다툼하는 당내투쟁으로 권력을 유지하므로 당연히 참을 ‘인(忍)’자도 듣기 싫어한다.
장쩌민이 속이 좁고 질투심이 강하다는 것은 작은 일에서도 알 수 있다. 저장(浙江)성 위야오(余姚)현에는 ‘허무두 유적지 박물관(河姆渡遺址博物館)’이 있으며 중국의 중점적인 문물보호단지이다. 당시 ‘허무두유적지 박물관’의 현판 글씨는 차오스(喬石)가 쓴 것이었다. 1992년 9월, 장쩌민이 참관할 때 차오스가 쓴 현판을 보더니 얼굴이 무섭고 음침하게 변했다. 수행원들은 아주 긴장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장쩌민이 차오스를 용납하지 않으며 또한 그가 우쭐거리기 좋아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쩌민은 어디를 가든지 현판에 제사(題詞)를 썼는데, 심지어 ‘지난(濟南)시 공안국교통지대(支隊)’와 ‘정저우(鄭州)시 퇴직엔지니어협회’에까지 제사를 썼다. 허무두 박물관장은 도량이 좁은 장쩌민의 눈밖에 나지 않으려고 박물관을 정돈하고 다시 대외에 개방한다는 것을 구실로 1993년 5월 장쩌민의 글씨로 바꾸었다.
마오쩌둥은 ‘웅문4권(雄文四卷)’이라고 불리며, 『덩샤오핑문선』에도 「묘론(猫論)」이라는 실용주의 사상이 있다. 장쩌민은 기껏 머리를 짜내어 세 마디 말―소문에 원작자는 왕후닝(王滬寧)이라 한다―을 생각해 냈는데, ‘3강(三講)’이라고도 한다. 책으로 찍어낸 후 중공 조직계통을 거쳐 널리 보급하였고 강제 주문으로 판매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원들은 장쩌민을 조금도 존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도처에서 벌인 여가수와 섹스 스캔들이나 그가 외국에서 ‘나의 태양(오 솔레미오)’을 마구 불러댄 것과 스페인 국왕 앞에서 머리를 빗은 것과 같은 여러 가지 더러운 일을 널리 전했다.
그러나 파룬궁 창시자 리훙즈(李洪志) 선생은 평민 출신임에도 설법할 때면 여러 분야의 교수, 전문가, 유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많은 석박사들이 심지어 만리도 마다하지 않고 날아와 설법을 들었다. 리훙즈 선생은 거침없이 몇 시간 동안 유창하게 이야기해도 원고가 필요없었으며, 설법한 녹음을 종이에 옮겨 적으면 곧바로 책으로 출판할 수 있었다. 이는 허영심과 질투심이 많고 속좁은 장쩌민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장쩌민의 생활은 극히 방탕하고 부패하다. 9억 위안을 들여 자신의 전용 호화비행기를 사들였고, 걸핏하면 국고에서 몇백 억 인민폐를 아들에게 주어 사업하게 했으며, 사돈친척관계를 이용하여 모든 친척과 측근들을 장관급 이상의 고급관리로 선발하였고, 측근들의 탐오와 범죄를 감싸 주는 등 나쁜 일에 갖은 수단을 다 썼다. 때문에 장쩌민은 분명히 파룬궁의 도덕적인 역량을 아주 무서워 했으며 파룬궁이 말하는 천국과 지옥, 선악에는 보응이 있다는 것이 정말일까 봐 더욱 무서워하였다.
장쩌민은 비록 중공의 최고권력을 장악하였으나 정치적인 업적과 재능이 부족했기에 수시로 자신이 중공의 잔혹한 권력투쟁 속에서 쫓겨내려갈까 봐, 그 ‘핵심’ 권위에 대해 아주 민감하였다. 견해가 다른 사람을 없애기 위하여 장쩌민은 음모를 꾸며 정적(政敵)인 양상쿤(楊尙崑), 양바이빙(楊白冰) 형제를 제거했다. 1997년 중공 15대(大)부터 2002년 16대까지, 장쩌민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내쫓았으나 자신은 관련규정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붙잡고 물러나지 않았다.
1989년 ‘6.4’이후, 중공의 새로운 총서기 장쩌민 등은 국내외 기자들과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 기자가 한 중국 여대생이 6.4 민주화 운동 때문에 쓰촨성 농장으로 귀양가서 벽돌운반 일을 배치받았으며 현지 농민들에게 여러 차례 강간 당한 사실을 질문했다. 장쩌민은 ‘당신의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폭도입니다. 만약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문화대혁명 때 장즈신(張志新)은 중공 감옥에서 윤간 당하고 후두(喉頭)를 잘렸다. 장쩌민이 볼 때 이런 것은 모두 ‘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이로부터 장쩌민의 깡패 같으며 변태적이고 잔혹한 성격을 볼 수 있다.
개괄적으로 말하자면, 장쩌민의 음침하고 어두운 심리, 독재권력욕, 잔인하고 포악한 인격과 ‘진선인’에 대한 공포가 장쩌민이 이유없이 파룬궁을 탄압한 원인이었다. 이 점은 공산당 조직과 고도로 일치하는 것이다.
장쩌민과 중공의 상호이용
장쩌민은 한마음으로 파룬궁을 ‘소멸’시키는 것으로 개인적인 분노를 발설하려고 했다. 자신을 뽐내고 정치적인 권모술수를 피우는데 열을 올렸지만 장쩌민의 무능력과 무식하고 재주가 없는 것은 사람들이 널리 알고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중국의 전통문화에 뿌리박고 있으며, 광범위한 사회적 기초가 있는 공법을 연마하는 군중들에 대해 장쩌민 한 사람으로서는 거의 무능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침 중국 공산당이라는 이 폭정(暴政)기계가 이미 완숙되어 예전의 다른 탄압과 마찬가지로 파룬궁을 없애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공산당 총서기 장쩌민은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는 식으로 탄압을 시작하는 버튼을 가볍게 누를 수 있었던 것이다. 파룬궁 탄압에서 공산당과 장쩌민의 호응과 공명은 마치 등산객이 크게 외친 소리에 눈사태가 발생한 효과와 똑같았다.
장쩌민이 99년 7월, 탄압명령을 내리기 전부터 파룬궁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토벌, 감시, 조사와 죄명 꾸미기 작업은 이미 시작되었다. 원인은 공산당이라는 이 사악한 영체, 사교(邪敎)조직의 사악한 본성이 본능적으로 ‘진선인(眞善忍)’이 자신의 존재에 위협적임을 느꼈고, 더욱이 이렇게 방대하고 꾸준하고도 빠르게 늘어나는 수련인들을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94년부터 중공 공안의 요원들이 파룬궁 수련생들 속에 잠입해 들어왔으나 어떠한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고 오히려 많은 요원들이 파룬궁에 동화되어 수련하기 시작했다. 1996년 『광명(光明)일보』는 기공에 대해 ‘선전도, 간섭도, 탄압도 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3불(三不)’정책을 어기고 문장을 발표하여 사상영역에서 파룬궁을 끊임없이 비판하였다. 그 후 공안과 ‘과학자’ 직함을 가진 정객(政客)들의 파룬궁에 대한 교란은 줄곧 그치지 않았다. 1997년 초 중공 중앙정법위원회 서기 뤄간(羅干)은, 죄명(罪名)을 꾸며 파룬궁을 없애버리기 위해 직권을 이용하여 공안부문에게 전국적으로 파룬궁에 대한 조사를 진행시켰다. 각지에서 ‘아직 어떠한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보고를 받은 뤄간은 1998년 7월, 또 중국 공안부 1국(정치보위국)을 통하여 공정(公政)[1998] 제555호『파룬궁에 대한 조사를 함에 관한 통지』를 발표하였다. 여기서는 우선 파룬궁이 ‘사교(邪敎)’라고 미리 죄명을 정하고, 전국 각지 공안부문에 체계적인 ‘잠입조사’를 진행하여 증거를 수집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사결과 여전히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사악한 영체조직인 중공이 이미 손을 쓰기 시작했을 때, 탄압기계를 작동시킨 가장 관건적인 일을 한 사람이 바로 장쩌민으로서 이때 그의 결정은 아주 주요한 작용을 일으켰다. 한 개체로서, 중국 공산당의 우두머리는 인성(人性) 중의 선(善)과 악(惡)을 구비하고 있는데, 만약 ‘선(善)’을 선택한다면 중공의 사악한 당성의 발작을 잠시 억제할 것이며 만약 ‘악(惡)’을 선택한다면 중공의 사악한 당성이 충분히 폭로되어 나올 것이다.
6.4 때, 중공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은 민주화 운동을 하는 학생들을 탄압할 의도가 없었다. 그러나 중공을 장악한 8명 원로는 탄압을 고집하였다. 덩샤오핑은 당시 ‘20만 명을 죽여서 20년의 안정과 바꿔오자’라고 말했다. 이 ‘20년의 안정과 바꿔 오는 것’은 실질상 20년 간 중국 공산당 정권을 더 유지한다는 것으로, 이는 중공 독재 전제(專制)의 근본목적에 부합하였기에 중공에 접수될 수 있었다.
파룬궁 문제에서, 당시 중공 중앙정치국의 7명 상무위원 중에 장쩌민만 탄압을 고집하였다. 장쩌민이 제기한 구실은 파룬궁은 ‘당이 망하고 국가가 망하는’데 관계된다는 것으로, 이는 중공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장쩌민의 개인권력 수호와 공산당의 일당 독재 유지라는 점에서 양자는 고도의 일치를 얻을 수 있었다.
1999년 7월 19일 밤, 장쩌민은 중공 고위층 회의를 열고 직접 사회를 보았다. 그는 자신의 권력으로 법률을 대체하고 인식을 ‘통일’하였으며 스스로 전면 탄압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또 중국정부의 명의로 전면적으로 파룬궁을 단속하였으며 세상 사람들을 기만하였다. 이리하여 중공과 중공이 통제하는 중국의 국가정권과 폭력기계는 전력을 다해 천지를 뒤덮는 기세로 무고한 파룬궁 민중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만약 당시 중공 총서기가 장쩌민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이번 탄압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말한다면 우리는 공산당이 장쩌민을 이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거꾸로, 만약 공산당이 그 피의 빚과 위기감 때문이 아니라면, 그 10가지 악(惡)을 두루 구비한 깡패적이며 천리(天理)에 반하고 인성을 말살하는 본성이 없었다면 그것도 절대 파룬궁이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의 사회에 대한 빠짐없는 전면적인 통제가 없었다면, 장쩌민의 파룬궁 탄압 의지 또한 조직의 보장, 재정의 보장, 문화선전부문의 보장, 외교적인 보장, 인원 보장, 설비 보장과 감옥, 경찰, 국가안전부, 군대와 이른바 종교, 과학기술, 민주당파, 공회(公會), 단위(團委), 부녀연합 등의 지지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 각도에서 본다면, 장쩌민은 공산당을 이용하였다.
장쩌민은 어떻게 중공을 이용하여 파룬궁을 박해했는가
장쩌민은 중공의 ‘전당(全黨)은 중앙에 복종’해야 한다는 조직원칙과 군대, 매스컴, 공안, 경찰, 무장경찰, 국가안전부, 사법계통, 인민대표대회, 외교, 사이비종교 단체 등 중공이 장악한 국가기계를 총동원하여 파룬궁 박해에 복무시켰다. 중공의 군대, 무장경찰, 공안경찰은 파룬궁 수련생을 납치하고 체포하는 데 직접 참가하였으며, 매스컴은 장쩌민 집단을 대신하여 거짓말을 퍼뜨려 파룬궁의 명예를 더럽혔고, 국가안전부 계통은 장쩌민 개인을 위해 복무하였는데 자료 제공과 수집, 거짓 조작, 거짓 정보를 제공하였다. 인민대표대회와 사법계통은 장쩌민과 중공의 범죄행위에 ‘합법(合法)’, ‘법치(法治)’등의 외투를 걸치게 하여, 각계 인민을 기만하여 장쩌민의 도구와 보호 우산으로 타락했다. 외교계통은 국제적으로 거짓말을 퍼뜨리고, 정치와 경제이익을 이용하여 일부 외국정부, 정계인물과 매스컴을 유혹하거나 매수하여 파룬궁 박해에 대해 침묵하게 만들었다.
장쩌민은 1999년 파룬궁 탄압을 배치하는 중앙사업회의에서 ‘나는 공산당이 파룬궁과 싸워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전반적인 탄압의 배치에서, 이른바 ‘명예 실추, 경제 파탄, 육체 소멸’이라는 3대방침을 실시하였으며 이로부터 전면적인 탄압운동을 펼쳤다.
(1) 매스컴을 이용하여 뉴스를 봉쇄
‘명예 실추’는 중공이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매스컴으로부터 진행되었다. 1999년 7월 22일, 파룬궁 수련생들을 체포한지 3일째 되는 날, 중공이 통제하는 매스컴들은 천지를 뒤덮는 반(反) 파룬궁 선전을 시작하였다. 베이징의 중앙텔레비전방송국(CCTV)을 실례로 든다면, 1999년 CCTV는 매일 7시간 동안 여러 가지 사전에 제작한 프로그램을 방영하였다. 파룬궁 창시인 리훙즈 선생의 설법을 대량의 속임수로 뜯어 고치고 왜곡한 데서부터 시작하여, 심지어 이른바 자살, 타살, 병이 있어도 치료를 거부하다가 사망한 사건 등, 온갖 재주를 다하여 파룬궁과 그 창시자에 대해 부정적인 모함선전을 진행하였다.
가장 유명한 실례를 든다면, 리훙즈 선생이 한 차례 공개장소에서 말한 ‘이른바 지구가 폭발한다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않는다[不]’를 잘라버려, TV에서는 ‘지구의 폭발은 존재한다’로 바꾸어 내보낸 것이다. 더욱 심한 것은 바꿔치기 하는 등의 수단으로 일반 형사범죄인들의 범죄행위를 파룬궁 수련생이 했다고 모함하여 세상 사람들을 기만하였다. 예를 들면, 베이징의 정신병자 푸이빈(傅怡彬)이 살인한 것과, 저장성의 거지독살사건 등등 정신병자나 살인범의 죄를 모두 파룬궁에 뒤집어 씌웠다.
중공이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2천여개 신문사, 천여개 잡지사, 수백개 지방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을 총동원하여, 전력으로 파룬궁을 모함하는 선전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런 선전을 다시 관영방송국인 신화사(新華社), 중신사(中新社), 중통사(中通社)와 해외 중공매체 등을 통하여, 해외 모든 국가에 퍼뜨렸다. 미확인 통계로는 짧디짧은 반년 사이에 중공매체가 중국 국내외에서 파룬궁에 대해 보도한 모함보도와 비판문장이 놀랍게도 30여만 차례에 달한다.
외국에 주재하는 중국 대사관과 영사관에서도 이른바 파룬궁을 비난하는 화보, CD와 단행본을 대량적으로 비치해 두었으며, 중국 외교부 사이트에도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비난하는 전문코너를 만들었다. 게다가 장쩌민 자신도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탄압에 나섰다. 1999년 말 뉴질랜드에서 열린 아태정상회의에서 장쩌민은 중공이 제작한 파룬궁 모함 소책자를 10여 나라 국가 지도자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장쩌민은 프랑스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외국매스컴을 통해 파룬궁이 사교(邪敎)라고 선포하였으며 ‘명예 실추’의 목표에 도달하고자 시도하였다. 한동안 검은 구름이 꽉 덮여 문화대혁명이 다시 오는 스산한 분위기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비방은, 바로 2001년 1월에 발생한 이른바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직접 이 연극을 연출하고, 신화사를 통해 전례 없는 속도로 전 세계에 퍼뜨렸다. 이 사건은 후에 국제교육발전기구(IED)를 포함한 여러 국제조직에 의해 거짓으로 날조한 것임이 입증되었다. 서방의 기자들이 이 같은 의문점에 대해 질문하자, 이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했던 한 직원은 중앙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방영한 일부 장면이 ‘나중에 보충해서 찍은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사람들은 의문을 금치 못했다. 그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 파룬궁 수련자들’이 어떻게 중국 공산당 당국과 이처럼 합작할 수 있단 말인가?
거짓말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진실이 폭로되는 것이다. 유언비어를 퍼뜨려 중상하는 동시에, 중국 공산당은 전력을 다해 소식을 봉쇄하였다. 특히 파룬궁에 관한 모든 해외소식과 파룬궁 수련생들의 각종 합리적인 해명요청을 모두 엄격하게 봉쇄하거나 없애 버렸다. 파룬궁 서적과 기타 자료들은 전부 소각시켰으며 중국에서 파룬궁 수련생을 인터뷰하려고 시도하는 모든 외국 뉴스매체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극단적인 대응조치를 취하거나, 해당기자를 중국에서 추방시켰다. 때로는 해외매체를 위협하거나 시장이익을 미끼로 자율적인 단속이란 미명하에 보도를 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파룬궁의 진실한 상황이나 당국의 잔혹한 탄압자료를 해외에 전달한 파룬궁 수련생에 대하여 중공 당국은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탄압수단을 취했다. 한 예로 랴오닝성(遼寧省) 다스차오시(大石橋市) 난러우(南樓) 경제개발구 둥장촌(東江村)에 사는 60여세의 리옌화(李艶華)씨는 2001년 2월 19일 파룬궁 진상자료를 배포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산 채로 맞아 죽었다. 경찰은 이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그녀가 파룬궁을 믿어 죽은 것이라고 모함했다.
또한 베이징의 칭화(淸華)대학에서만, 10여 명의 교수와 학생들이 파룬궁 자료를 전달했다는 이유만으로 중형(重刑)을 판결 받았다. 충칭(重慶)대학 여자 대학원생이자 파룬궁 수련생인 웨이싱옌(魏星艶)이 경찰에게 강간당한 사건이 폭로된 후, 7명의 충칭 수련생들이 중형을 선고받았다.
(2) 벌금과 재산몰수로 생존권 박탈
‘경제 파탄’은 전체 중공 국가기계가 진행한 것이다. 5년이 넘는 탄압 기간 동안, 수십만 중국 파룬궁 수련생들이 위협조로 벌금을 부과 당했는데 적으면 몇 천 위안에서 많은 경우 몇 만 위안에 달했다. 이러한 벌금 부과는 그 어떠한 법률조문에도 근거하지 않은 것이며, 지방정부, 직장 조직과 파출소, 공안국에서 임의로 진행한 것이다. 벌금을 부과 당한 사람은 어떠한 법률문건으로 된 영수증도 받지 못했다.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또다른 일종의 경제약탈 방식이다. 파룬궁 수련을 지속하는 수련생들은 수시로 경찰의 재산몰수에 직면해야 했는데, 재산을 몰수해 가는 자들은 현금과 재물을 가져갔으며 어떤 때는 심지어 농촌의 저장식량까지 빼앗아갔다. 벌금부과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몰수해 간 재물에 대해서는 어떠한 영수증도 없으며 대개 집행자들이 중간에서 착복하였다.
동시에 파룬궁 수련생들은 직장에서 실직 당할 위험에 직면했으며, 농촌에서는 토지를 회수 당하는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중공은 심지어 이미 퇴직한 노인마저도 가만두지 않았는데 많은 은퇴 노인들의 퇴직금을 주지 않거나 거주하는 집을 회수하였다. 일부 상업활동에 종사하는 파룬궁 수련생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은행예금을 동결당했다.
이런 정책을 집행하며 중공은 연좌제를 실시하였다. 직장에 파룬궁 수련생이 있으면 상사나 직원들은 상여금을 타지 못하거나 승진을 정지시켜 사회적으로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한 원한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파룬궁 수련생의 가족들도 해고의 위험에 직면했고, 자녀들의 학업을 중단시키거나 집을 회수하는 등등의 위협에 직면하였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모든 파룬궁 수련생들의 경제수입을 끊어 수련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도록 핍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3) 고문으로 학대하고 마음대로 살육
가장 피비린내 나는 ‘육체 소멸’은 기본적으로 공안, 검찰, 법원 계통에서 집행하였다. 명혜망(Minghui.net)의 미확인 통계로는, 1999년 7월 20일 이래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민간을 거쳐 전해온 소식 중 박해로 사망이 실증된 파룬궁 수련생들은 2004년 12월 25일 현재 이미 1195명이나 된다. 박해 받아 사망한 사례는 전 중국의 30여 개 성, 자치구, 직할시에 분포해 있다. 2004년 10월 1일까지 사망사례가 높은 지역을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헤이룽장성, 지린성, 랴오닝성, 허베이성, 산둥성, 쓰촨성, 후베이성 등이다. 사망자 중 나이가 가장 어린 경우는 겨우 생후 10개월에 불과했으며 최고령자는 72세였다. 또 여성이 51.3%를 차지했으며, 50세 이상의 노인이 약 38.7%을 차지했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한 중공 관리가 밝히기를, 박해 받아 사망한 파룬궁 수련생들의 숫자는 실제로 이 숫자를 훨씬 더 초과한다고 한다.
그리고 파룬궁 수련생들의 몸에 가해진 여러 가지 고문은 더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구타, 채찍으로 때리기, 전기고문, 냉동, 줄로 묶기, 장시간 족쇄와 수갑 채우기, 불로 태우기, 지지기, 매달아놓기, 장시간 서 있기, 꿇어앉기, 대바늘과 철사로 찌르기, 성고문, 강간 등이다. 2000년 10월, 랴오닝성 마싼자(馬三家) 교양원의 간수들은 18명 여자 파룬궁 수련생들의 옷을 모두 벗긴 후 그들을 남자감방에 밀어넣고 남자 죄수들에게 마음대로 성폭행하고 짓밟게 하였다. 이 일체와 얼룩진 피눈물은 필설로는 이루 다 표현할 방법이 없다.
‘정신병 치료’ 남용(濫用) 역시 파룬궁 수련생들을 박해하는 많은 고문 중 하나이다. 정상적이고 이지적이며 건강한 파룬궁 수련생들이 불법적으로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중추신경계를 파괴하는 이름 모를 약물을 주사 당하였다. 어떤 사람은 전신 혹은 국부가 마비되었고 어떤 사람은 두 눈이 멀거나 두 귀가 먹었다. 어떤 사람은 근육과 기관이 썩어서 문드러졌고, 어떤 사람은 일부 혹은 전부의 기억을 상실하였다. 어떤 사람은 내장기능이 엄중하게 손상되었고, 어떤 사람은 박해 받아 정신병자가 되었다. 또 어떤 사람은 약물발작으로 급속하게 사망하였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정신병 치료’ 수단으로 파룬궁 수련생을 박해한 사례는 중국의 23개 성(省), 시(市), 자치구에 널리 분포되었으며, 몇 백 개 성ㆍ시ㆍ현ㆍ구의 정신병원이 박해에 참여하였다. 사안의 숫자와 분포범위로 볼 때, 파룬궁 수련생에게 향정신성 약물을 남용한 박해는 국가기관에서 체계적으로 실시한 정책이다. 적어도 천여 명의 정신이 정상적인 파룬궁 수련생들을 강제로 정신병원과 마약중독 치료센터에 감금하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강제로 여러 가지 중추신경을 파괴하는 약물이나 음식물을 주입했으며, 장시간 줄에 묶어놓거나, 전기고문 등 혹형을 가하였다.
(4) 법률을 초월한 610사무실
1999년 6월 7일, 장쩌민은 중공 정치국 회의에서 전면적으로 파룬궁을 탄압하는 문제에 관해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중앙파룬궁문제처리 지도팀를 설립하였다. 6월 10일에 설립하였으므로 대외로는 ‘610사무실’이라고 불렀다. 그 후, 이 ‘610’ 사무실은 위에서 아래까지 전국 각급 정부에 퍼졌으며 파룬궁을 공격하는 모든 사무를 구체적으로 책임졌다. 중공 당위원회 지도 하의 정법(政法)위원회, 매스컴과 정부기관 공안, 경찰, 법원과 국가안전부 등은 모두 그 졸개였다. ‘610사무실’은 명목상으로는 국무원에 소속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국가와 정부체제 밖의 당무(黨務)조직으로 어떠한 법률조문이나 국가정책 규정에도 제한을 받지 않고, 국가법률체계와 정부체제를 초월하여 국가자원을 최대한 관리하고 배치할 수 있는 초권력 기구로서 독일 나치의 게쉬타포와 비슷하였다. 장쩌민이 명령을 내려 파룬궁 탄압을 시작한 직후인 1999년 7월 22일, 신화사는 중공 중앙조직부 책임자와 중공 중앙선전부 책임자 등의 연설을 발표하여 장쩌민의 파룬궁 박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였다. 이 일체는 모두 공산당의 엄밀한 조직상에서 장쩌민의 사악한 계획에 협조한 것이다.
많은 사례가 증명하다시피, 파룬궁과 관련된 모든 안건은 공안국과 검찰원, 법원에서 독립적으로 처리할 권한이 없으며 반드시 ‘610사무실’의 명령을 들어야 했다. 붙잡히고, 감금되고, 학대 받아 사망한 수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의 가족이, 공안, 검찰, 법원 계통에 문의하고 고소했을 때, 전부 ‘610사무실’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통지 받았다.
그러나 이 ‘610사무실’의 존재는 어떠한 법률적인 근거가 없다. 610이 중공의 모든 체제 내 기구에 명령을 하달할 때, 대다수는 서면 명령이나 통지가 없었으며 오직 구두 전달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듣고 전달하는 모든 자는 녹음이나 녹화, 심지어 기록도 못하게 했다.
이런 임시 독재정치 기구는 바로 중공이 역대로 사용해 온 관용적인 수법이다. 중공의 역대 정치적인 숙청운동에서 모두 이런 비정상적인 수단과 비정상적인 임시기구로 지도한 적이 있다. 예를 들면 중앙문화혁명팀는 문화대혁명 당시에 공산당의 폭정을 전국적으로 추진했었다.
중국 공산당은 장기적인 폭정과 고압적인 통치과정에서, 폭력과 거짓말, 소식 차단에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강대하고, 가장 사악한 국가공포주의를 몸에 익혔다. 그 잔혹함과 거짓으로 기만함을 운용하는 기술이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 파룬궁 탄압의 규모와 정도는 더욱 전무후무(前無後無)하다. 역대 정치운동 중에서 사람을 괴롭히고 해치며 죽이는 방법과 경험, 잔혹하고 교활하며 간사하게 남을 속이는 방법을 통해 이미 체계적이며 효과적으로 경험을 쌓은 결과였다.
(5) 군대와 국가재정을 이용한 박해
국가군대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통제는 군대로 하여금 인민을 탄압할 때,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마음대로 하게 하였다. 이번 파룬궁 탄압에서 장쩌민은 경찰과 무장경찰을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1999년 7~8월에 전국의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의 평화적인 백성들이 파룬궁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 베이징에 청원하러 갈 때 장쩌민은 직접 무장한 군대를 동원하였다. 그리하여 베이징으로 통하는 중요 도로에는 실탄을 장전한 총을 든 군인들이 경찰과 협조하여 청원하러 가는 파룬궁 수련생들을 가로막고 붙잡았다.
국가재정에 대한 중공의 통제는 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하는 데 경제적인 배경이었다. 랴오닝성 사법청 고위관리는 일찍이 랴오닝성 마싼자 ‘노동교양원’ 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한 적이 있다. “파룬궁에 대한 재정투입은 이미 전쟁 비용을 초과했다.”
비록 지금 중공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 국가경제자원과 인민의 피땀으로 거둔 수입을 유용하여 파룬궁을 박해했는지 아직 분명하진 않지만, 생각해 보면 천문학적인 숫자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다. 2001년 중공 공안 내부에서 나온 소식으로는, 톈안먼 한 곳만 해도 파룬궁 수련생을 체포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하루에 인민폐로 170만~250만 위안인데, 이것을 1년 지출로 환산해 보면 6억2천만 내지 9억1천만 위안이 된다. 전국적으로 도시에서 구석진 농촌에 이르기까지, 파출소 경찰에서 공안국, 다시 각급 ‘610사무실’의 인원까지, 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위해 고용한 사람을 대략 계산해도 적어도 몇백 만 명인데, 이 사람들에 대한 임금은 매년 몇천 억 인민폐에 달한다. 뿐만 아니라 장쩌민은 거액의 경비를 써가면서 파룬궁 수련생들을 감금하는 노동교양소를 확대건립하고 세뇌센터와 기지 등을 건립하였다. 예를 들면 2001년 12월, 장쩌민은 일차적으로 42억 위안을 투입하여 파룬궁 수련생을 전향시키는 세뇌센터와 기지를 건립하였다. 장쩌민은 또한 금전을 이용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 박해에 참여하도록 자극하고 고무 격려했는데 파룬궁 수련생을 체포할 때마다 몇천에서 몇만 위안씩 보너스를 지급하였다. 그리고 파룬궁에 대한 박해가 가장 사악한 랴오닝성 마싼자 노동교양소에서 중공은 일차적으로 소장 쑤(蘇)모에게 인민폐 5만 위안, 부소장인 샤오(邵)모에게는 3만 위안을 보너스로 주었다.
중국 공산당 총서기 장쩌민은 이 사악한 박해의 개시자이며 박해를 기획 지휘한 자이다. 그는 중국 공산당 매커니즘을 이용하여 파룬궁 박해를 저질렀으므로 이 역사적인 죄악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중국 공산당과 공산당이 오랫동안 경험을 쌓은 잔혹한 매커니즘이 없었다면 장쩌민도 이런 사악한 박해를 전혀 발동하고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장쩌민과 중공은 상호 이용하여, 온 세상의 비난도 꺼리지 않고 자기 한 몸과 공산당 일당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진선인(眞善忍)을 반대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이번 죄악과 황당무계한 탄압이 발생할 수 있었던 진정한 원인이다.
장쩌민은 내부로부터 중공을 타도
중국 공산당은 중국에 공산주의를 이식하기 위하여 중국의 전통문화를 뿌리부터 절단하였다.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참패함으로써 공산주의가 황당한 오류임을 실천으로 증명한 후에도, 중공은 도리어 중국을 다시 전통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비(非)공산주의적인 양성(良性)사회로 되돌릴 능력과 패기 혹은 바람이 없었다. 원인은 중공의 일당독재 자체가 다른 정치단체의 국정 참여나 혹은 중국의 통치권력을 나누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중국은 오직 공산주의라는 악성 종양이 전면적으로 발작하여 붕괴되고 중공과 함께 해체될 때까지 기다리는 듯하다.
90년대 갑자기 나타난 파룬궁이라는 비정치적인 민간수련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개변시켰고 중국의 전통문화와 군중들을 하나로 융합시키면서 소리없이 중국인의 뿌리를 되찾아왔다. 파룬궁의 전파는 가히 중국사회의 안정과 선해(善解)에 대한 가능성을 제공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많은 중공 당내의 지식인들도 파룬궁의 전파는 근본적으로 사회 안정에 유익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개인의 사리사욕 때문에 공산당 고유의 사악을 이용하여 중국에서 수련인을 박해하였고, 사회에서 이런 선(善)을 향하고 국가사회에 이익만 있지 해(害)가 없는 수련인 토벌을 발동하였다. 이 박해는 국가와 인민을 죄악과 재난 속에 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최후에는 근본적으로 공산당 자신을 타도하는 것이다.
장쩌민은 중공을 이용하여 동서고금의 일체 사악한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파룬궁에 대처하였고, 법률, 도덕과 인성(人性)은 모두 큰 파괴를 당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국가정권의 통치기초를 훼손한 것이다.
장쩌민 집단은 일체 사용 가능한 모든 재력, 물력과 인력을 투입하여 파룬궁에 대처하여 국가와 사회에 커다란 부담을 조성했으며 중공은 근본적으로 이런 박해를 장기간 진행할 수 없다.
중공과 장쩌민은 박해 중에서 깡패성, 잔혹성, 사기 등 여러 가지 수단을 사용하였고 중공의 사악한 경험들을 집대성하였는데 파룬궁 박해로 인하여 전반적으로 부각된 것이다.
중공과 장쩌민은 일체 선전도구를 동원하여 파룬궁을 비방 날조하였으며 탄압과 박해를 위한 구실을 조작해 냈다. 일단 최후에 거짓말이 탄로나고, 이 일체 사악함이 박해의 실패로 만천하에 드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때, 거짓을 날조한 선전 도구는 더는 민중을 속일 수 없으며 중공은 철저히 신뢰를 잃고 민심도 잃을 것이다.
장쩌민은 1999년 파룬궁을 탄압할 초기에, ‘3개월’만에 파룬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그러나 중공은 파룬궁의 역량을 과소평가했으며 전통과 신앙의 역량을 과소평가하였다.
5년이 지나갔다. 파룬궁은 여전히 파룬궁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더욱 널리 전해졌다. 장쩌민과 중공은 도리어 이 정사(正邪)의 대결에서 크게 실패했으며, 자신의 깡패적이고 잔혹하며 사악한 본성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장쩌민은 현재 평판이 너무나 나빠져서, 당 안팎으로부터 궁지에 몰렸으며 많은 법률소송과 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하고 법의 심판을 받게 하라는 외침에 직면하고 있다.
중공은 본래 이 탄압을 이용하여 그 폭정(暴政)을 굳건히 하려고 했지만 결과는 그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에너지까지 모두 소진해 버리고 말았다. 현재 중공은 이미 너무나 악화되어 약으로는 구할 방법이 없다. 마치 한 그루 썩은 고목나무처럼 바람으로 흔들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지게 될 것이다.
결 론
99년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였던 장쩌민은 이 사악한 박해의 개시자이자 박해를 기획하고 지휘한 자이다. 장쩌민은 중국 공산당의 권력, 지위, 사람을 괴롭히는 수단, 운행 매커니즘을 충분히 이용하여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발동하였으므로 이번 역사적인 죄악에 대한 책임이 있다.
다른 한 방면으로, 만약 중국 공산당이 없었다면 장쩌민도 근본적으로 이 사악한 박해를 발동하고 진행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탄생한 그날부터 시작하여 정의와 선량을 적으로 삼았고, 탄압을 수단으로 삼았으며, 박해를 장기로 삼았고, 일당독재라는 사상통제를 통치의 기초로 삼았다. 공산당은 본능적으로 진선인(眞善忍)을 무서워하고 파룬궁을 증오하였는데 파룬궁에 대한 탄압과 박해도 우연 중의 필연이다.
중공과 장쩌민의 상호 이용은 양자의 운명을 하나로 얽어 놓았다. 파룬궁은 마침 장쩌민을 기소하고 있다. 장쩌민이 법으로 처단될 때 중공의 말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진선인을 수련하는 좋은 사람들에게 인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박해를 진행한 것은 하늘이 용납하지 않는다. 장쩌민과 중공의 악행은 인류에게 영원히 심각한 교훈을 남겨줄 것이다.
(2005년 5월 8일 수정판 올림)
對중국 단파방송 - SOH 희망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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